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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1,12 조선 왕조 세조 광릉 남양주시

세월민초 2014. 1. 12. 23:47

 

조선 왕조 실록

제7대 왕 세조(수양대군)

 

 

1428년(세종 10) 진평대군(晉平大君), 1432년 함평대군(咸平大君)에 책봉되었다가 이해 7월 진양대군(晉陽大君)으로

 다시 1445년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책봉되었다. 세종은 왕위에 오르자 유가정치(儒家政治)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세자(뒤의 문종)를 성균관에 입학시킴은 물론 왕업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 왕자들의 교육에도 힘썼다

 이러한 세종의 배려 속에 왕자들 가운데 다재다능했던 수양대군은 세종의 병약함을 기회로 국정전반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는 대군으로 있으면서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해 도제조(都提調)가 되어 토지제도의 재개혁을 맡았으며

 〈치평요람 治平要覽〉·〈역대병요 歷代兵要〉·〈의주상정 儀註詳定〉 등의 책을 찬술했고 중국의 〈운회 韻會〉를 한글로 번역하기도 했다

 

여인천하

세조를 리더한 여장부 정희왕후

  계유정난 당시 사전 정보가 누설되어 수양대군이 거사를 망설이자 손수 갑옷을 입혀

그에게 용병을 결행하게 할 만큼 결단력이 강한 여장부였다. 1468년 그의 아들 예종이 19세에 왕위에 오르자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을 하고 이후 손자 성종이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기도 하였다

 

영화,  관상

 

수양대군은 악과 피를 부른 군주였나

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문종이 재위 2년 3개월 만에 죽고 12세의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세종 때의 안정된 왕권과 정치는 크게 약화되어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 의정부 대신들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이 초래되었다

 수양대군은 권람(權擥)·한명회(韓明澮) 등을 모사로 삼고, 1453년 10월 홍달손(洪達孫)·양정(楊汀) 등 심복무사를 친히 동원해

 김종서·황보인·정분(鄭苯) 등을 비롯해 조극관(趙克寬)·이양(李穰)·조수량(趙遂良) 등 정부의 핵심인물들을 추살(椎殺) 또는 주살(誅殺)해 제거했으며

 대군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을 모반의 죄명을 씌워 강화로 축출한 뒤 사사했다

 

   MBC드라마 조선왕조500년 수양대군의 책사 한명회역 정진,무명에서 스타로 탄생하다

 

 중앙의 권신을 제거한 수양대군은 그 후환을 막기 위해 함길도도절제사로 동북지방의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종서의 여당인 이징옥(李澄玉)을 파면하고 그 후임에 박호문(朴好問)을 임명했다

 이에 반발한 이징옥이 박호문을 죽이고 스스로 대금황제(大金皇帝)를 칭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다

 무단적인 방법으로 실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스스로 영의정부사·이조판서·병조판서·내외병마도통사 등 여러 중직을 겸해 전권과 병권을 독차지하고

정인지(鄭麟趾)를 좌의정에, 한확(韓確)을 우의정에 임명하도록 하여 새 정부를 구성했다

이렇듯 대세가 수양대군에게 기울어진 것을 알아챈 단종은 수양대군 추대세력의 압력에 굴복해 마침내 스스로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물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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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드라마 사육신

 

 세조의 전제권 강화에 불만을 품은 일부 유신들은 표면적으로는 세조의 불의의 찬탈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세조를 왕좌에서 몰아내고 단종을 복위시켜 관료지배체제를 구현시키려 했다

그리하여 성삼문·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 등 전직·현직 집현전 출신들은

1456년(세조 2) 6월 창덕궁에서 명의 사신을 향응하는 기회를 이용해 세조를 시해할 계획을 세웠으나

 이 모의에 참여했던 김질·정창손 등의 밀고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세조는 이 사육신 사건을 계기로 대규모 숙청을 단행했으며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해 영월로 유배시켰다

 또한 금성대군(錦城大君)이 영남의 유생들과 단종복위운동을 벌이다 발각되자

 노산군(단종)을 다시 서인으로 폐하고 1457년 10월 관원을 시켜 사사했다   - 백과사전 -

 

세조는 문둥병으로 죽는다

 1468년 세조는 자신의 건강(문둥병)이 점점 악화되어 가고 있음을 깨닫고, 한명회 및 신숙주, 구치관 등을 불러

 그들에게 왕세자 해양대군(예종)을 잘 보필해줄 것을 부탁하였으며, 9월 7일에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다음 날인 9월 8일에 문둥병으로 승하하게 된다

 

광릉

세조의 능은 서울로부터 다소 떨어지고 골이 깊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있다

 광릉자리는 원래 다른 이의 묘자리였으나 풍수상 길지라 하여 묘자리의 주인이 세조에게 바쳤다고 전해지며 일부 풍수가들은

세조의 광릉 자리가 좋아 조선 500여 년을 세조의 후손들이 통치하였다고 전하기도 한다.

1468년(예종 즉위) 11월 28일 주엽산 아래 세조를 예장하고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1483년(성종 14) 3월 30일 66세의 나이로

온양행궁에서 희왕후가 승하하자 같은 해 6월 12일 광릉 동쪽 언덕에 예장하였다 - 광릉 자료 펌 -

 

광릉매표소 1,000원

 

재  실

 

 

 

 

 

세조와 정희왕후는 금실이 좋아 각종 연회는 함께 참석했고 후궁은 한분만 두었다

 

 

 

 

 

 

 

홍살문과 정자각

능하구역에는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르는 참도가 생략되어 있다. 이렇게 간소하게 개혁된 상설제도는 이후의 왕릉 조성에 모범이 되었다

 

정자각 좌측은 세조릉이고 우측은 정희왕후릉

릉은 같은 산줄기에 좌우 언덕을 달리하여 왕과 왕비를 각각 따로 봉안하고 두 능의 중간 지점에 하나의 정자각을 세우는 형식인

 동원이강(同原異岡)릉으로서, 이러한 형태의 능으로는 최초로 조영되었다. 좌측 능선의 봉분이 세조의 능이며

오른쪽의 봉분이 정희왕후의 능이다. 광릉은 다른 왕릉에 비해 간소하게 조영되었다

 

 세조는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세조는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세조의 유언에 따라 이전까지 석실로 되어 있던 능을 회격(灰隔)으로 바꾸어 부역 인원을 반으로 줄이고 비용을 절감하였으며

 또한 봉분 주위에 둘렀던 병풍석을 없애면서 병풍석에 새겼던 십이지신상은 난간의 동자석주에 옮겨 새기는 등의 상설 제도를 개혁하였다

 

 

 

 

비 각

 

 

 

 

 

섭정을 통한 최초의 여왕

정희왕후는 판중추원사 윤번의 딸로 1418년(태종 18)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났다

 1428년(세종 10) 수양대군과 혼인하여 낙랑부대부인에 봉해졌으며, 세조가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남편인 세조가 먼저 승하한 뒤 그녀의 둘째 아들인 예종이 즉위하였는데, 선천적으로 병약하였던지라 재위 1년 2개월만에 예종 역시 승하하였다

 당시 선왕이 누구로 하여금 뒤를 잇게 할 것인가를 정하지 않고 승하하게 되면, 그 권한은 대비에게 주어졌다

정희왕후는 이 권한을 통해, 젊은 나이에 요절한 자신의 첫째 아들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자산군을 왕으로 지목하여 대통을 잇게 했다

그리고는 예종대의 섭정을 이어 7년이라는 기간 동안 수렴청정을 행하게 되었다. 이는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이었다

 

 

 

 

 

 

 

 

 

 

 

 

 

 

 

수목과 함께 걷는 길

광릉수목원 앞

찾아 가는 길, 의정부버스터미널 앞에서 21번 시내버스 20~30분 간격, 좌석 3201번(포천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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