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세계

23,12,08 명화 나폴레옹

세월민초 2023. 12. 16. 02:48

 

조 커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에 빛나는 배우, 호아킨 피닉스

 

 

 

 

난 지금까지 내 인생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좆같은 코미디더라고요 

 

생각해 보니 나만 미친 건가요, 세상이 더 미쳐가는 건가요?

 

몇 년 전에 영화 조커를 감명 깊게 보았습니다

 

불행하게도 정신 병력이 있는 아서 ( 주연, 호아킨 피닉스 )의 삶을 그린

현대 사회의 슬픈 단면을 역설한 영화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번 영화는 그에 대한 두 번째 작품을 보게 되어 기대됩니다

 

2023년 12월, 내가 본 명화 나폴레옹

 

 

 

끝없는 아름다운 사랑과 끝없는 야망의 전쟁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 후 왕당파 진압 등 군인으로 성공한다

 

파티에서 마주친 조세핀과 사랑에 빠져 결혼하게 되는데

조세핀의 전남편은 군인 장교였으나 죽고 슬하에 아들과 딸이 있는 미망인이었다

나폴레옹은 끝없는 사랑을 하며 조세핀에게 자식을 원하지만,

결국 자식을 못 낳자 이혼하였으나 아름다운 사랑은 계속된다

 

또 혼란스러운 시대에서 나폴레옹은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만

황제로서의 삶이 순탄하지만은 않습니다

 

나폴레옹의 성공부터 몰락까지, 그의 인생이 독특한 관점으로 스크린에 펼쳐집니다

 

전설적인 명화 십계, 벤허, 타이타닉 등 우리에게 감동과 화려한 예술 작품을 선서한

명화들 후 올만에 나폴레옹의 일대기를 그린 명화에 극찬을 보냅니다.

 

 

 

 

 

장르, 액션. 드라마. 전쟁

감독, 리들리 스콧

주연, 호아킨 피닉스. 바네사 커비

상영 시간, 2시간 38분

 

 

 

 

 

 

 

 

 

 

 

 

 

 

 

 

황제를 정복한 여인 조세핀

 

 

 

 

 

나폴레옹이 쓴 모자,, 27억에 낙찰, 역대 최고가

 

 

 

 

 

나폴레옹

 

 대혁명과 인권 선언

 

17세기 후반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재정 전문가 콜베르를 기용하여

강력한 중상주의 정책을 펼쳤다

 

이에 따라 국가의 부를 늘리려고 상업을 중심으로 한 경제 정책을 실시하여

그 결과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강한 국가로 올라섰고, 루이 14세는 절대 군주

(모든 권력을 쥐고 나라를 운영하는 힘을 가진 국왕)로서 최대 전성기를 맞았다

하지만 18세기 초 베르사유 궁전 건축과 팔츠 전쟁이나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과 

여러 전쟁에 참여하여 국가 재정을 바닥네고 루이 15세 때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 참가하여 엄청난 재정만 낭비한 채 성과도 없이 물러나고 말았다

 

이어 ‘제2차 백 년 전쟁’이라 불리는 영국과의 식민지 쟁탈에서 오랜 전쟁도 밀려

재정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또 루이 16세가 즉위하였을 때는 이미 국가 재정은 위험 수위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런데도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함으로써 왕실 재정은 거의 파탄 상태에 빠졌고

루이 16세는 이를 개선하기 위해 제3 신분인 평민들만 냈던 세금을 제1신분(성직자)

제2신분(귀족)도 거두려는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루이 16세는 군대를 동원해 의회 활동을 위협하려 했다

이를 본 파리 시민들은 폭동을 일으켜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니

이 사건이 바로 프랑스 대혁명(1789년)의 도화선이었다

 무거운 세금과 부역으로 고통받고 있던 농민은 영주 저택을 습격하여 성을 약탈하고

봉건적 의무가 기록된 문서들을 불태웠다

농촌이 대혼란에 빠지자 국민 의회에서는 봉건제 폐지를 제의했고, 성직자·귀족들이

그 제의에 찬성하면서 새 헌법의 기본 원칙을 만들어 그 결과를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프랑스 의회가 결의하여 1789년 8월 26일에 발표한 ‘인권 선언’이다

그 후 나폴레옹은 군부의 힘을 업고 정치 일선에 등극하여 왕권에 도전한다.

 

 

 

 

나폴레옹

 

 

 

 

 

나폴레옹 황제 대관식

 

 

 

 

 

파리의 개선문

 

 

 

 

 

나폴레옹 시대의 유럽

 

 

 

 

 

 2천 미터 이상의 고지로 이루어진 과다라마 산맥이 나폴레옹의 앞을 막고 있었다

스페인 북동부 도시 부르고스(Burgos)와 마드리드 사이에 오래된 대로가 있었고

그 길은 소모시에라(Somosierra) 고개를 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고갯길도 정상은 1400m 정도로 만만치 않았으나

  평지에서 고개 정상까지는 약 3km로 험악하고 좁은 고갯길이 계속 이어져 있었다.

 

 

 

 

 

 

 

 

 

 

 

스페인 군대는 전투에서  많은 낙오자를 내며 투델라에서 후퇴해온 군인들과

마드리드의 중앙 임시 정부인 훈타(junta)에서 수천명의 병력을 보내

이 소모시에라 고갯길을 지키기로 했다

 

  그 지휘관으로는 산 후안(Benito de San Juan) 장군이다 

산 후안 군대는 마드리드로 후퇴해온 정규군과 새로 모집한 신병, 애국심 하나로

몰려온 자원병 등으로 이루어진 9천명 정도, 전체적으로 군기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신이 내려준 든든한 보루인 소모시에라가 있었고, 마드리드에서

가져온 16문의 대포가 있었습니다.  

 

 

 

 

 

소모시에라 전투의 모습입니다

 

 

 

 

 

 

 

 

 

 

1807년 프리틀란트 전투

 

 폴란드 기병들은 프랑스 근위대에 들어온, 근위대 중에서도 값싼 미숙련 병사들이다


나폴레옹이 거느렸던 군대에는 프랑스군 외에도 라인 연방 소속의 독일인 부대와

 이탈리아인, 폴란드인,이집트 출신의 마멜룩들까지 다양한 국적의 병사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나폴레옹이 폴란드인들을 좀더 특별히 생각했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수세에 몰렸던 1813년 말, 군수품 공급이 딸렸던

 최후의 수단으로 독일 및 이탈리아 등 소위 동맹국 병사들의 무장 해제를 지시했는데

이때도 폴란드군은 무장 해제에서 제외시켰습니다

 

이는 폴란드인들의 충성심을 믿었기 때문이며

자신들의 조국을 갈기갈기 찢어 놓은 러시아, 프로이센 및 오스트리아에 대한

그들의 증오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러시아 원정 패배

 

 

 

 

 

영국과의 전투에서 패배

 

 

   나폴레옹은  연합군에게 패배 후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를 떠났다

 6년간의 유배 생활을 보내다가 위암으로 인해서

 1821년 5월 5일 오후 5시 49분에 향년 51세를 일기로 눈을 감게 된다.

 

 

1840년, 나폴레옹 1세 유골의 귀환(Retour des cend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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