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나들길 5코스 고비 고갯길
# 강화 버스터미널 - 외포여객터미널 거리 20km 소요 시간 6시간 40분
"강화도 천도" 왕이 걸었던 길
강화 나들길 5코스는 동쪽에서 강화 중심부를 지나 서쪽 바다 외포리 항까지
약 20km이며 소요 시간은 7시간이나
오늘은 3시간의 여유가 있어 강화 시내 일부를 걷는다
강화 버스 터미널에서 4차선 도로를 건너면 왕이 걸었던 길이고
길가에는 장식물로 강화도와 연관된 인물사가 쭉 세워져 있다
왕의 길
나들길을 따라가면 옛 강화 산성 일부를 만나고 조금 가면 남문이다
" 강도의 꿈 " 강화도 천도
" 강도 " 과거에 강화도를 달리 부르던 명칭이며 때는 고려 고종 4년 1217년이다
강도(江都)라는 이름은 고려 시기 몽골의 침입을 맞아 강화도로 천도했던
시기부터 사용된 명칭으로 정식 행정 명칭은 아니었다
강화도는 후삼국 시기 혈구진(穴口鎭)이라 불리는 서해의 제 해권과 관련된 주요한 군진(軍鎭)으로
이곳은 고려의 수도 개경으로 통하는 예성강과 임진강 및 한강 어구의 관문이라는
군사적. 경제적 입지 때문에 고려 초에 ‘강화(江華)’로 이름을 고쳤다
1018년(현종 9) 현령(縣令)을 두었다가 1232년(고종 19)에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군(郡)으로 승격시키고 ‘강도’라고 불렀다
당시 천도는 그전 해 몽골의 사신 저고여(著古與)의 살해 사건을 계기로 벌어진
제1차 침입이 일단락된 후 무신 집정이었던 최우의 주도 아래 시행된 것으로
이후 1270년(원종 11)까지 39년 동안 이곳에 도읍하였다
천도 당시 궁궐을 비롯하여 여러 절 등이 모두 개경과 같이 설치되어
강화도 북산의 이름도 개경의 송악산을 따서 ‘송악산’이라 하였으며 그 아래 궁궐이 세워졌다
이 외에도 오랜 기간을 거치면서 새로이 축성을 하고 별궁과 사찰이 건설되었다
1237년(고종 24) 강화외성(外城)이 건설되었고, 1251년(고종 38)에는 중성(中城)이 축조되어
2중 3중으로 성을 쌓아 몽골군의 침략에 대비하였고
고종이 죽자 몽골로 인질로 갖던 세자가 돌아와 새 임금이 되니 그가 원종이다
원종은 무신 정권과 싸우나 불리하여지자 원수의 나라 몽골군을 불러 들어 무신 정권을 제거하고
1270년 (원종 11) 개경으로 환도하지만 백성과 나라를 팔아먹는 첫 번째 왕이 된다
다시 이 땅에 들어온 몽골군은 강도의 성곽을 허물고 궁궐을 비롯하여 민가에도 불을 질렀는데
이때 백성들을 죽이고 강도의 모든 건축물이 소실되어 흔적도 없었다
고려 39년 비운의 "강도의 꿈"은 이렇게 사라졌다
나라의 왕은 누구인가 "
숭고한 오백 년 역사를 돌이켜보면 왕이 국민을 사랑하고 국민을 위하여 희생했던
임금이 과연 몇 분이나 있을까 ?
어느 때는 왕이 무능하여 신하들의 권력에 휘둘러 당파 싸움하며 반대자를 역적으로 몰아 죽였다
어느 시기는 왕이 죽으면 어린 왕을 대신하여 수렵청정하는 여인 천하 대비가 있어
여자가 권력에 취해서 독배를 마시는 여인의 비극도 있었으니,,
또 내시들이 권력을 잡고 모든 관직을 독차지하여 왕은 인질이 되었던 때도 있었다
어느 시기에는 왕이 폭군이 되어 많은 사람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고 국민들에게는 고통과 슬픔을 주었다
조선 왕조 오백 년의 주역 이성계와 정도전이 꿈꾸던 세상은 무엇이었나 ?
위하도 회군하여 이성계가 왕에 오르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자가 정도전이다
왕에 오른 이성계와 정도전은 지금의 경복궁을 함께 건설하여 화려한 고려 왕국을 건설한다
이성계의 인품을 보자
내면의 성격을 보면 무인이었으나 문인에 가까워 많은 사람하고 국정을 의논했을 것 같다
그러나 권력 욕심이 많아 아들들과 함께 세운 왕권을 훗날 본처 5형제 왕자에게는 세자를 주지 않고
후처 아주 어린 서자를 세자로 삼아 늙어 죽을 때까지 뒤에서 왕 놀이하겠다는 피도 눈물도 없는
권력의 단면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그러면 여기서 정도전의 인품을 보면 성격이 독특하고 권력에 욕심이 많아 왕이 되고 자 하는 인물로
권력의 앞에서는 머리를 숙이고 뒤에서는 자기 정치를 하는 사람 같다
그러니까 국민과 함께하는 문민정치를 외치며 왕은 아무것도 않는 상징적 왕으로 남고
왕은 아니지만. 왕을 대신하여 모든 권력을 정도전 자신이 가지고
자기의 이상을 펼치고자 하는 독단적이며 무서운 권력의 탐욕을 가진 자다
결국 탐욕의 권력에 눈이 멀어 이방원 칼날에 쓸쓸히 죽고 머리는 나무 위에 메달었다 한다
지금의 우리 정치사와 무엇이 다른가 ?
100년의 무신 정권 도방 정치사
이번에는 개경에서 염하(강화도 앞바다}를 건너 강화도로 왜 천도하였는지 알아보자
조선 왕조 오백 년 사를 보면 100년(1170~1270)간 왕권이 사라지고 무신 정권의 정치가 시작된다
시기는 명종 말기 무신 정권의 주역은 이의민이라는 천민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소금 장수고
어머니는 노예로 절에서 일했다
이의민의 머리는 무식했으나 힘이 장사에 싸움을 잘하여 길 가던 군 장군에게 잘 보여
군인으로 등용되어 세월이 가면서 높은 장군에 오른다
그 당시 문인들의 정치는 당파 싸움에 백성들은 기근과 세금으로 왕권을 불신하였고
지방에서 난이 일어라는 사태까지 이르자
군인들이 문인들을 내치고 모든 권력이 무신 시대가 된다
세월이 가면서 이의민의 무신 정권도 부패와 무능으로 같은 군인 최충현의 칼에 죽으니
13년 만에 권력이 사라진다
최충현이 집권하자 도방을 설치하고 모든 정사는 도방에서 이루어져 왕이 아무런 권한이 없었다
무신 시대는 계속 이어지는데 최충현이 죽고 아들 최우가 등극하니 왕이 세자에게 왕권을 이어가듯
도방도 자식으로 계속 이어진다
이 시기에 몽골 칭기즈칸이 1차 침략이 되자 얼마 후 최우는 강화도 천도를 결정하자
왕과 문인 신하가 반대하여도 강제로 시행하는데 천도 행렬이 왕과 백성이
약 30리에 이르렀으며 하늘도 노하여 큰비가 내렸다고 기록되었다
이때 최우는 강화도로 천도하여 궁궐을 짓고 성곽을 쌓으며 몽골군에 대비한다
아마도 다음에 몽골 침략에 나약한 왕이 항복하면 나라가 망하여 속국 된다는 생각도 되었을 거시고
나라가 망하면 도방도 없어지니 자기의 권력을 유지하려고 천도했다는 설도 있다
그 당시 몽골의 침략에 동아시아와 유럽까지 다 항복하였으나 이유야 어쩌던 몽골의 8번의
침략에도 유일하게 우리나라는 왕권을 지켰다는 것이며
그러나 왕이 강화로 피신가자 몽골 군대에 속수무책으로 국민들은 피눈물을 흘렸고
수천만 명이 죽었다는 슬프고 가슴 아픈 우리들의 역사 이야기이었다
그러면 다시 도방과 최우의 이야기를 해보자
그 시대에는 노예 제도가 있어 천민보다 못한 노예는 평생 주인을 섬기며 노예로 살아야 한다
최우가 거느리는 노예는 수백 명으로 개인 사병이고 나라의 군대와 행정 등 모든 결정권을
왕이 아니고 도방의 최우가 하니 왕보다 더 높은 자리다
최우의 노예 사병 중에서 김준이란 자가 무예에 뛰어나고 영특하며 의리가 있어
노예를 사면하고 높은 장군으로 임명하여 함께 도방의 정사를 논하는 위치까지 오른다
그러나 최우는 슬하에 아들이 없고 서자 두 명이 있는데 둘 다 개망나니에 못 된 성품의 자들이다
최우는 죽을 무렵 유언으로 김준에게 서자 두 명 중 도방을 이끌 자를 선택하여 대러 오라 명 하니
도방의 3번째 주인은 최항이었다
최항은 난폭하고 의심이 많아서 자기를 욕하거나 반란의 의심이 있으면 모두 죽었고
거기에 술과 계집을 좋아해서 나라의 정사는 김준이 다 한다
세월이 가면서 최항은 더 난폭하여지자 김준은 최항을 서서히 죽어가는 독약을 먹이여 죽이고
최항의 아들 최이가 4대째 등극하니 최씨 가문 도방 60년 사도 끝난다
이어서 나라의 실권은 노예 출신 김준이 되나 차차 왕과 문인들이 득세하여
왕실과 불하가 계속되자 원종 (11년)은 왕권을 찾고자 직접 외세 몽골 군대를 불러드려
김준을 죽이는데 김준의 양아들 임이 아버지를 사살한다
이로써 우리나라 도방 정치 100년 사가 끝나고 왕은 개경으로 돌아가 왕이 정치 일선에 등장한다
원종 왕은 세자 때 몽골로 인질로 갔는데 그런 인연으로 수천만 백성을 죽인 몽골 군대를
또 불러드렸고 강화도 왕궁과 성을 처참하게 파괴하고 불을 질렀으니
나라의 왕이 아니라 반역자 역적 놈이다.
남문을 지나 옛 거리를 가다
계속 올라가면 조양 방직이다
사거리에서 우측으로 조금 가면 정문이나
개방시간은 오전 11 ~ 오후 9시이라 대문은 잠겼다
그래서 담을 따라 내부를 보았다
1937년 홍재용, 홍재묵 형제가 설립한 조양방직 공장이다
설립 당시 125,000원(현시가 60억 원 내외)의 자본금으로 시작하였으며
700여 평의 2층 건물과 50여 대의 직조기를 갖추고 인견과 마직물 염색을 주로 하였다
그러나 설립 이후 착공에 이르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공장 가동 후 1년여가 되는 1939년에 큰 화재 가 나서 소실되고 피해액은 40만원(200억 원 내외) 다
조양방직은 한국전쟁을 거쳐 1958년에 폐업하고 그동안 방치하다
2010년 공장 카페로 개업하여 현재는 많은 관광객이 방문한다
조양방직 금고
OBS 경인 방송에서 강화 나들길 5코스가 방영되어 감명 깊게 보았는데요
사진에 보이는 시멘트로 만든 조양방직 금고가 제일 궁금하더라고요 ㅎ
얼마나 현금이 많았으면 저렇게 큰 금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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