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과 사진 여행

19.11.02 논개 남강을 노래하다

세월민초 2019. 11. 5. 14:21



진주성 전투와 논개


진주의 아름다운 산천은 영남에서 제일이다


이 글은 고려조 명종 때의 문신 이인로(1152~1220)가 그의 " 파한집"에 기록한 말이다


남강이 흐르는 문학의 거리 깨끗하고 조용한 도시

청년 시절부터 몇 년 전 유동 축제까지 그러고 보면 진주도 벌써 여러 번 갔나 보다

작년에는 비가 내리는 날 촉석루를 찾았다.




이번에는 지리산을 가는 경유지로 우선 교통편과 숙박 지역으로 경남 진주시로 가 다음 날 산청군 거림으로 갈 예정이다

서울 남부터미널 10시 진주행 우등 고속 요금 29,000원 진주 터미널 2시 30분 도착, 소요 시간 4시간 30분





공북문


진주성 전투


조선 시대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는 두 차례 있었다

임진년(1592년, 선조 25년) 10월(이하 음력)의 전투를 제1차 진주성 전투라 하고

이듬해 계사년(1593년) 6월의 전투를 제2차 진주성 전투라 부른다


 제1차 진주성 전투는 곧 진주대첩으로서 임진왜란 3대첩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반면, 제2차 진주성 전투는 성이 함락됨과 동시에 대학살의 참극을 빚은 전투로 기록된다


진주성은 소수의 병력으로 적의 대군을 물리친 빛나는 승리의 표상(임진승첩, 壬辰勝捷)인 동시에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처절히 항전하다 끝내 순국한 충의의 제단(계사순의, 癸巳殉義)으로 우리 역사 속에 아로새겨져 있다.


ㅡ 불멸의 이순신 드라마를 보면 제2 진주성 전투가 있기 얼마 전에 진주 목사 김시민, 이순신, 권율 장군이 모여

진주성 방어에 대하여 의논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순신과 권율 장군이 병력을 지원하겠다고 하나 김시민 장군은

 진주성으로 많은 병력이 집결하면 이순신과 권율 장군 두 진영이 위험하다고 거절한다


만약, 김시민 장군이 지원 병력을 요구했다면 진주성은 함락이 안 될 수도 있었을 것이나

이순신과 권율 장군 두 진영이 무너져 일본군에게 조선은 함락되었을 것이다


 진주성 전투를 앞두고 김시민 장군은 여자들도 남자 옷으로 입혀 군사가 많은 것처럼 했다는 일 하도 있다

왜적 30만을 상대로 김시민 장군과 7만 군관민은 진주성 전투에서 장렬히 죽은 충신들이라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ㅡ








임진 전투에서 사용한 화포



천혜의 요새였던 진주성과 푸른 강물이 흐르는 남강




서장대



진주성 내 호국사절



대웅전



족히 500년 이상 살아 온 느티나무



북장대



북장대 부근에 있는 용다리 전설의 돌


지금 진주시 동성동 212-1번지(삼성화재) 부근에는 예전에 용머리가 양쪽으로 붙어 있는 돌다리가 하나 있었는데

 이 용다리에는 슬픈 사랑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때는 고려 초 진주의 한 마을 군수 이 씨에게 딸이 셋 있었고

 그중 둘째 딸은 불행히도 출가하자마자 남편이 죽어 천정으로 돌아와 지내고 있었다

군수의 집 머슴 돌쇠는 이때부터 아씨를 사모하게 되었고

아씨 역시 돌쇠의 성실하고 충직한 모습에 마음이 끌리게 되었다

그러나 신분상의 차이로 인해 서로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 했으며, 둘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그러다 아씨는 상사병으로 그만 목숨을 잃게 되었고

돌쇠는 아씨를 장사지내러 가는 도중 용다리 위에서 무심결에 도량 물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마치 죽은 아씨처럼 보여 “아씨”하고 소리치다 그만 미쳐버리고 말았다.


돌쇠는 다리 옆 고목에서 목을 맨 상태였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조용하던 용다리 밑 개천에서 수천 마리나 될 듯한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려 왔는데

이는 마치 죽은 돌쇠가 우는 소리와 같았다.



촉석문






촉석루


촉석루는 진주의 상징이자 영남 제일의 명승이다

남강 바위 벼랑 위에 자리한 탓에 뛰어난 경치까지 볼 수 있는 촉석루는 전시에는 장졸을 지휘하던 지휘소로

 평시에는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는 곳으로 또 때로는 과거를 치르는 고시장으로 쓰였다

 지금의 촉석루는 한국 전쟁 때 불탄 것을 진주 고적 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으로 1960년에 중건한 것이다




논개 사당






논개 초상화



의암 사적비와 의암

의암 사적비(義巖事蹟碑)는 1593년 6월 29일,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일본군에게 함락되고

조선의 7만 군관민이 순절하자 일본군 장수를 끌어안고 순국한 논개의 사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의암


진주성 촉석루 아래 남강변 강가 수면 위로 솟아올라 있는 바위가 있다

바위는 가로 3.65m, 세로 3.3m의 윗면이 평평한 모양을 하고 있으며

 서쪽 면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논개(論介)는 성을 점령한 일본군이 승리의 기쁨에 들떠 있을 때 일본군 장수를

이곳으로 유인한 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했다

이러한 논개의 순국정신을 현창하기 위해 영남사람들은 이 바위를 ‘의암’이라고 불렀다.








촉석루와 논개 벽화



남강 천수교를 돌아서,,







논개 남강을 노래하다


# 그 바위 홀로 서 있고 그 여인 우뚝 서 있네

이 바위 아닌들 그 여인 어찌 죽을 곳을 찾았겠으며

이 여인 아닌들 그 바위 어찌 의롭다는 소리 들었으리오

남강의 높은 바위 꽃다운 그 이름 만고에 전화리 #










축석루 야경













진주교


오늘 밤은 진주에서 숙박하고 내일은 지리산 천왕봉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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