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역사 여행

13,02,16 조선왕릉 서오능

세월민초 2013. 2. 18. 01:20

 

                              13,02,17 내가 가본 역사기행

유네스코 세계유산

조선왕릉 서오능 길을 산책하며 

 

사적 제198호. 5릉은 경릉(敬陵)·창릉(昌陵)·익릉(翼陵)·명릉(明陵)·홍릉(弘陵)을 일컫는다

 1457년(세조 3) 세자 장(璋:뒤에 덕종으로 추존됨)이 죽자 이곳에 안장(경릉)한 이래 1470년(성종 1) 덕종의 아우인 예종과 그 계비인 안순왕후 한씨의 창릉,

 1681년(숙종 7) 숙종의 비인 인경왕후 김씨의 익릉, 1721년(경종 1) 숙종과 그 계비인 인현왕후 민씨와 제2계비인 인원왕후 김씨의 명릉

 1757년(영조 33) 영조의 비인 정성왕후 서씨의 홍릉이 들어서 능의 무리를 이루었다. 그밖에 이곳에는 명종의 큰아들인 순회세자의 순창원(順昌園)이 경내에 있으며

 1970년에 숙종의 후궁인 희빈장씨의 대빈묘(大嬪墓)가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경릉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왕릉은 왕의 것이 오른쪽에, 왕비의 것이 왼쪽에 조성되지만 이것은 반대로 왕릉이 왼쪽에

 왕비릉이 오른쪽에 자리잡고 있는 형식이다. 추존왕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왕릉에 나타나고 있는 난간석이나 망주석, 석수 등의 호위가 없다

 반면 왕비릉은 생전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므로 능제도에 따라 구색을 갖추었으며, 난간석의 기둥은 창릉의 형식을 따랐으므로 특이하다

 창릉도 몇 가지 특색을 지니고 있다. 즉 상석을 받친 석족(石足)은 일반적으로 4개의 양각 귀면이지만 창릉은 문고리 모양을 조각했으므로 북과 흡사한 느낌을 준다

 또 난간석의 기둥머리는 연잎과 연주문(連珠紋)이 보편적이지만, 창릉의 큰 석주는 둥근머리 밑에 환상받침을 마련하고 사각 석주로 변천되어가는 형식이다

                                                                                                                                                                  -서오능 자료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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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울고 웃는 여인 천하

질투와 음모속에 살다간 왕의 여인들

 

숙종과 아홉 여인의 파란만장한 궁궐의 비화

 

오랜 세월 궁궐은 백성들로 부터 희망과 존경의 대상이었고 하나의 군주를 섬기며 나라의 안녕과 평온을 바라는 구심점이였다

그러나 궁궐의 뒤 안길에는 권력과 암투속에 하루 밤을 지나는데는 긴 공포와 절규의 한숨 소리로 가득했으리라

그것은 권력의 균형이 흔들리거나 무너지는 시기에는 반드시 여인이 등장하고 소인배가 득세하였다

그런가 하면 왕의 권력이 무력화되여 강성 신하가 궁궐을 지배하기도 하고 내시가 궁궐을 장악하여 왕을 대신하기도 하는

참으로 불행한 왕과 가짜 왕 사이를 넘나드는 사연이나, 이것도 권력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운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조용하고 평화롭게 보이나 질투와 시기 피비린내라는 살육의 음모속에서 파란만장한 세월을 살아가는 왕의 여인들 !

권력에 눈이 멀어 자식을 왕비로 보내는가 하면 권력과 권력이 야합하여 강제로 궁궐로 보내지는 여인들의 비운

한번 들어가면 죽어서 나올 수 있다는 참혹한 궁궐속에 가야만 했던 서글픈 많은 여인들, 그 여인들의 진실한 사랑은 무엇인가 ?

역사 기록은 천년의 세월이 흘러도 변화지 않으나, 왕의 자리는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당대 최고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장희빈

악녀을 품을 수 밖에 없은 사내들의 성욕 그 진실

 

 

그 녀의 태생은 아버지가 역관이었고 어머니 윤씨는 조사석의 종이었으니 천민의 자식으로 태여났기에 여인의 야망을 꿈꾸웠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권력의 야합으로 장희빈이 궁궐로 가는 절호의 기회이였으며, 그 녀가 그리던 여인의 야망이 실현되는 게기가 된다

어쩌보면 그 동안 짓눌렸던 백성과 천민들은 편안히 살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오랜 세월을 기다렸을것이고

그 중심이 누구든 말이다, 장희빈은 어릴적부터 그런 생활속에서 자랐고 여자로 태여났지만 그 꿈을 이루고져 했을것이다

그 녀가 꿈꾸웠던건 임금과 자식을 통하여 서민과 천민이 잘 사는 정치를 하고져 했는지도 모른다

 

장희빈이 궁중에 들어가는 시기는 붕당정치가 극에 달하고 숙종이 즉위하면서 남인이 정계를 주도하는 격동기였다

그러나 숙종 6년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장희빈은 궁 밖으로 쫓겨난다

숙종 9년, 서인인 모후 명성왕후가 승하하자 다시 남인이 권력에 중심이 되고 장희빈은 궁으로 들어와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아마도 장희빈은 당쟁싸움에 희생양일 수도 있고 그 중심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기록으로 보면 인현왕후는 1667년생으로 장희빈이 인현왕후보다 8년 년상이고, 숙빈 최씨보다 11년 년상이다

그리고 숙종보다 2년 년상인데,이렇게 두 여인보다 나이가 많으면서도 왜 숙종은 장희빈을 총애 했을가

 

그 당시의 정치판을 알아 보자,숙종은 남인이고 어머니 명성왕후는 서인이다

다음 대를 내려오면서도 영조는 노론이고 사도세자는 소론이다

이와 같이 궁궐에서는 부모 자식간, 신하들 사이에서도 권력의 중심을 잡기 위해 당파 싸움에 휘말려

처절한 음모속에 3대가 역적으로 몰려 죽고 죽이는 광란의 질주가 몇백년간 지속되였다

왕과 함께 오래도록 남인 세력들이 집권하려면, 왕의 마음을 언제든 움직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여인이 필요했고

그 대한으로 천민이나 천하절색 미인이며 학풍이 있는 장희빈을 선택했으리라

 

그것은 말할 필요없이 아름다운 미모와 섹스한 몸매 그리고 간드러지는 목소리에 애교,풍부한 지식과 지혜를 겸비하고

타고난 감상적인 표현으로 사내의 심장을 두둘기며 끝없은 요기로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거시다

그리고 장희빈의 타고난 몸매에서 숙종이 헤여나지못하도록 밤에 열기도 한 몪했을것이고,,?

 

                                                                                                     - 세월 민초가 보는 궁궐속에 비화 -

 

명 릉(숙종과 인현왕후,인원왕후)

조선 제 19대 1721년(경종 1) 숙종과 그 계비인(2번째 부인) 인현왕후 민씨의 능과 좌측에 홀로 있는 묘, 제2계비인(3번째) 인원왕후 김씨의 능

 

  숙종과 그 계비인(2번째 부인)  인현왕후 민씨 능

   

 

숙종의 초상화

 

조선조 19대 숙종(1661~1720 향년 60세, 1674~1720 재위)

 

재위시에 당쟁이 심하여 신하들에게는 엄격한 군주였으나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의 파쟁이 그칠 날이 없었다
그러나 숙종은 여인들에게 다정다감했고 숙원(淑媛) 장씨(張氏)를 총애하여,1688년 소의(昭儀)로 승격시켰으며
이듬해 장씨에게서 출생한 왕자(景宗)의 명호(名號)를 정하고자 하였다


서인들이 이를 반대하자 서인의 거두 송시열(宋時烈)을 유배시키고 사사(賜死)하였다
왕자의 명호를 정하였으며, 왕비 인현왕후를 폐위하고 장씨를 희빈(禧嬪)으로 승격하며 1690년에 왕비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1694년 4년 뒤 남인을 추방하고 다시 서인을 등용시켰으며 폐비 인현왕후를 복위시켰다,이어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키고

 1701년 7년 뒤에 무고죄(誣告罪)로 사사(賜死)하였다,붕당정치가 절정을 이루던 시절,나라를 피비린내나는 환국의 소용돌이로 몰았지만

여인들 앞에선 온화함을 잃지 않았던 숙종의 여인들에 대해 알아 봅니다

 

숙종임금의 여인들 (9명)

 

           1. 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 (딸 둘을 낳았음)

2. 인현왕후(仁顯王后,민씨1667년생)

3. 인원왕후(仁元王后. 1687년생)

         4. 희빈 장씨(장옥정. 1659년생) 장남 (제20대 경종) 차남 성수

5. 숙빈 최씨(1670년생) 장남 영수, 차남 연잉군(제21대영조)

6. 명빈 박씨아들 연령군
7. 영빈 김씨   8. 귀인 김씨  
9. 소의 유씨

 

인현왕후 초상화

둘째부인. 인현왕후(仁顯王后),민씨 (1667-1701.향년 35세)

숙종의 부인들중 역사에 이름이 많이 알려진 여인이며 자식없이 35살이란 젊은나이에 죽은 비운의 여인

정파는 서인 1681년 15세때 숙종의 계비가 됨
1689년 23세때 기사환국으로 궁중에서 쫒겨나 서인(평민)이 되고,1694년 28세때 갑술옥사로 왕후로 복귀
1701년 중전으로 있을 때
35세로 사망(남편 숙종임금의 나이는 41세) 자신보다 3살 아래인 숙빈최씨를 많이 아끼고 보살폈다

 

제2계비인(3번째 부인) 인원왕후 김씨의 능

 초상화는 없음

 

셋째부인. 인원왕후(仁元王后,1687년 ~ 1757년) 김씨 향년 71세, 숙종의 계비로는 두 번째고

인현왕후와 장희빈 사망 1년후 1702년(숙종 28) 10월 3일에 16세의 나이로 숙종의 나이 42세때 세 번째 왕비로 책봉되었다

 

숙종임금과 나이차는 26세 숙빈최씨 보다 17세 아래이며

경종임금보다 1살위였지만 왕대비였고 영조보다는 7살연상이였지만 대왕대비였다

즉 인원왕후는 경종 즉위한 이후엔 왕대비가 되었고, 영조 즉위 이후에는 대왕대비가 되었다
처음에는소론이었다. 남편숙종과 연잉군 때문에 노론으로 당색을 바꿨으며.특히 연잉군을 아꼈다고 한다
또한 연잉군도 인원왕후를 친어머니 이상으로 따랐다고 한다. 자기보다 1살아래인 경종보다는 영조를 아꼈다고 한다


경종1년(원년), (1721)년에 영조의 생모가 1718년 사망하고 3년째 되던해, 영조를 왕세제로 등극시키고 자신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인원왕후는 훗날 연잉군이 임금으로 등극하기 위한 결정적인 인물이다.
무덤은 서오릉의 명릉(明陵)이며 숙종, 인현왕후 옆에 묻혀있다

 

익 릉( 첫번째 부인)

조선 제 19대 1681년(숙종 7) 숙종의 비인 인경왕후 김씨의 능, 숙종과 인현왕후.인원왕후 묘에서 혼자 멀리 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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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 대빈묘(大嬪墓)

1970년에 숙종의 후궁인 희빈장씨의 대빈묘, 원래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문형리에 위치하였으나 1969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장희빈 초상화

넷째부인. 희빈 장씨(장옥정) (1659 -1701) 향년 43세, 정파는 남인 장남 경종(제20대 임금) 차남 성수

아들 경종이 임금되는것을 못보고 43살이란 젊은 나이에 사약을 받고 비명으로 간 여인

 

숙종은 오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하다가 마침내 장씨와 사이에서 왕자 윤(:景宗)을 낳았고 1689년(숙종 15) 1월 윤을 원자로 책봉하였다
이에 따라 소의 장씨는 희빈에 오르고, 세자책봉은 불가하다고 상소한 서인의 거두 송시열은 유배되어 사사(賜死)되었으며
나머지 서인들도 유배되어 남인(南人)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기사환국 己巳換局)

이 해 5월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올리자

서인 박태보(朴泰輔) 등 80여 명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참혹한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1694년(숙종 20) 서인의 김춘택(金春澤) 등이 다시 서인의 집권을 위해 남인들을 역모로 고발하였고
마침내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서인들이 정권을 잡았다

숙종은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장씨를 희빈(후궁)으로 강등시켰다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가 죽자 희빈 장씨가 자신의 거처인
취선당(就善堂) 서쪽에 신당(神堂)을 차려 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한 것이 원인이라고 지목되었다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張希載)가 처형되고 곧이어 숙종으로부터 자결을 명령받아 죽음을 당했다

 

 

 

 MBC TV 특종 놀라운 세상을 보고

 이날 방송은 서오릉내 장희빈 묘소 바로 위쪽에 큰 바위가 있고

그 바위의 틈을 가르며 나무 한그루가 자라고 있는 것을 보여줬다. 나무가 바위를 뚫고 자라는 경우는 흔치 않는 일이다

현재 장희빈의 묘는 숙종과 인현왕후의 묘인 명릉 근처에 위치해 있다. 이는 1969년 경기도 광주에 있던 묘를 옮긴 것이다

당시 묘지의 책임자는 "장희빈의 묘를 이장할 때 장희빈의 기를 누르기 위해 일부러 바위 아래에 묘를 뒀다"는 관계자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밝혔다.그렇다면 장희빈의 기운이 정말 자신을 짓누르던 바위를 나무를 통해 걷어내려는 것일까
이날 방송은 전문가의 현장조사를 통해 나무가 바위를 가른 것이 아니라 두개의 개별 바위의 틈에서 나무가 자란 사실을 확인했다

이어 상수리 나무가 화강암을 뚫고 자라기가 무척 어렵다는 설명도 나왔다 

 

바위틈 사이에서 나온 상수리 나무

묘 위에서 본 장면

 

 

 경종 4년

장희빈의 아들 경종 [景宗, 1688~1724. 향년 37세. 재위1720∼1724)
어머니 장희빈이 1701년 죽고난뒤
19년후인 1720년에 임금이 되고 4년후 1724년에 사망했다

 

훗날 어머니 장희빈이 사약을 받고 죽자 그 충격으로 말더듬이 증상까지 보이면서

병을 얻어 자식을 낳지 못하게 된것으로 되여있다

야사에서는 장희빈이 죽으면서 세자의 불알을 움켜쥐고 잡아당기며 죽는 바람에 아이를 낳지 못했다고 하며

즉 제2의 연산군이 될 수 있는 사건을 겪었지만 원래 심성이 착한 경종은 숙빈최씨를 잘 모셨다고 한다

 

경종재위기간 4년동은 노론 소론의 당쟁의 절정기였고 경종의 사망에 대해서는 독살설이 많았다


1. 게장과 생감, 게장과 생감은 상극인 음식이라 한의학에서는 함께 먹는 것을 꺼린다

왕세제 연잉군(영조)은 병석의 경종에게 이 두 음식을 함께 올렸다고 한다

 

2, 인삼과 부자, 게장과 생감을 먹은 뒤 병세가 급격히 나빠진 경종에게 연잉군이

 이번에는 인삼과 부자를 올렸다고한다

 

독성이 강한 약재인 부자. 이를 두고 당시 어의는 크게 반발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경종의 이복동생인 제21대 영조는 재위기간 내내 이복형인 경종 독살설로 시달렸다

 

장희빈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당대 최고의 여인 숙빈 최씨 

 

 

 배우,한효주

초상화가 없음 

다섯째부인.화경숙빈(和敬淑嬪) 최씨(崔氏)최복순(1670-1718. 향년 49세)

남편 숙종의 사랑을 받았으나 아들(영조)이 임금되는것을 못보고 눈을 감은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다가 간 여인

조선 제19대 왕 숙종의 후궁이자, 제21대 왕 영조임금의 어머니이다

중전 인현왕후 보다 3살 년하이고, 장희빈보다 11년 년하이다
무수리로 궁궐에 들어와 인현왕후를 섬기다가 인현왕후 폐출 후 숙종의 승은을 입어
연잉군(후의 영조)을 낳았으며 정1품 숙빈에 봉해졌고
숙빈 최씨사망후 2년후에 숙종도 승하했다

 

실제 최숙빈이 어떤 인물 이었을지는 당시 기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최숙빈이 사망한 후에 쓰여진"숙빈최씨신도비"에서는 최숙빈의 성품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남의 장단점을 말하기 좋아하지 않으셨다. 곁에서 모시는 자가 혹시라도 말하면 그때마다 가르치고 꾸짖으셨다.궁내에서 모두 칭찬하고 찬미했다

숙빈은 품행이 부드럽고 아름다웠으니, 그 성품은 맑고 신중했으며 그 행동은 도탑고 무거웠다

이는 뒤집어 말하면 두드러지게 나서는 것을 경계하는 신중하고 차분한 성품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최숙빈이 남긴 족적은 이런 평가와는 자못 상반 됩니다

 

최숙빈은 인현왕후의 깊은 총애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숙종과의 만남도 인현왕후와 관련 되어 있습니다

인현왕후가 폐비되어 쫓겨난지 3년째 되는 해인 1692년 음력 4월 22일 숙종이 늦은 밤에 궁을 거닐고 있었는데

마침 지나던 궁녀처소 한곳에서 불빛이 새어 나와 호기심에 들여다 보니궁녀 하나가 진수성찬을 차려 놓고 상 앞에 꿇어 앉아 있었다

왕이 이상히 여겨 뭐하느냐 물으니, 궁녀가 대꾸하길,"소녀는 중전의 시녀로서 특별한 총애를 받았습니다." 라며

폐비된 인현왕후의 생일이라 생신상 차려 놓고 진상례를 올리고 있었다고 대답 하였다

이 궁녀가 바로 최숙빈이고 숙종은 그런 최씨의 충정을 가상히 여겨 가까이 두게 되었다는 일화입니다

 

이는 당대 기록인 수문록에 기록된 일화로서 최숙빈의 등장이 인현왕후와 서인에게 어떤 의미 였는지를 짐작케 하는 일니다

이렇게 숙종의 총애를 입기 시작한 최숙빈은 신도비에 기록된 내용과는 상반되게도

끊임없이 인현왕후의 무고함을 주장하며 장옥정의 패악을 진언하였고, 숙종 역시 그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최숙빈의 가장 큰 공로는 장희빈을 결정적으로 중전의 자리에서 끌어내린 갑술환국이 그녀의 입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장희빈(당시 중전)이 최숙빈(당시 숙원)을 독살하려 했다는 소문이 돌아 정국을 들쑤셨는데

결정적으로 최숙빈의 입에서 남인(장희빈)이 자신을 독살하려 했다는 고변이 나온 것입니다

숙종이 대로 했고, 사건 정황을 제대로 파악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체 남인을 숙청하기 시작합니다

장희빈은 폐비되어 다시 희빈이 되었고, 폐비였던 인현왕후는 복위되어 돌아오는 상황이 최숙빈의 입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최숙빈의 고변은 이로서 끝나지 않습니다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7년후 갑자기 병을 얻어 사망하게 되는데 인현왕후가

사망하기 전부터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돕니다

이 소문역시 최숙빈의 입을 통해 숙종에게 전해지고 역시 대로한 숙종은 장희재와 장희빈을 한달 터울로 죽여버립니다

 

여기서 위의 신도비문은.최숙빈이 사망한 때는 숙종 재위 연간인 숙종 44년(1718)입니다.

한창 서인이 정국을 주도할 때였으니, 서인정국에 대로가 있는 최숙빈을 나쁘게 말할 때가 아니였습니다

최숙빈의 성격은 다분히 포장되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하지만, 그렇다고 포악하고 간교한 성격이었다고 볼수도 없습니다

최숙빈은 최선을 다해 정적이자 연적이었던 장희빈을 제거했습니다

 

장희빈과 최숙빈은 서로를 죽여야만 살수 있는 관계였습니다.오히려 인현왕후보다 장희빈과 악연으로 엮인 것은 최숙빈입니다

최숙빈 때문에 장희빈은 폐비 되었고, 종국엔 죽어야 했으며, 그 아들 경종의 왕위 역시

최숙빈의 아들 영조에게 빼앗겨야만 했으니 역사적 라이벌로 꼽으라면 장희빈 최숙빈을 꼽아야 할 것입니다

 

 

영조 초상화

숙빈최씨 아들 연잉군(제21대 영조) 1694-1776 .향년83세)

 영조(재위 1724-1776 )는 어머니 사후 6년뒤에 임금이된다

장희빈의 아들 경종의 죽음을 둘러싸고도 독살설이 제기되는 이유는 당시 노론 소론 두 서인계열간의 대립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경종시대에 대거 소론에 의해 노론이 한바탕 정치적 숙청을 당하는 일이 있었고
당시 왕세제였던 영조가 세제의 자리는 물론이고
목숨까지 위태롭기도 하였을 정도였다

따라서 이러한 시련을 딛고 왕위에 오른 영조에 대한 후대의 평가가 경종시대의 이러한 불안한 생활

정치적 입지의 위태로움을 느껴, 살기 위해 영조를 위시한 노론들이 경종을 독살했다는 설이 나온것이다

 

훗날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의 눈에는 정치적 대립 끝에 왕위에 오른 자신의 아버지(영조)를 보는 사도세자의 시각이 그리 좋지 않았다

그래서 사도세자는 아버지와 달리 반노론 성향을 가지게 된다.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기도 하였다

이것이 구실이 되어 사도세자가 모함을 받아 죽게되는 결정적 원인이 된 것이다 ,결국 사색당파 싸움의 희생물이 된것이라고 볼수있다

 

홍 릉

조선 제21대 1757년(영조 33) 영조의 비인 정성왕후 서씨의 능

 

 

수경원(영조의 후궁이며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조의 후궁이며 사도세자의 어머니 이씨 묘,원래는 경기도 고양의 옛 연희궁 자리(현재의 서울시 신촌동)에 위치하였으나

1968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수경원에는  무인석이나 문인석이 없다

 

 

순창원(順昌園)

 명종의 큰아들인 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의 묘 

 

 

경 릉

1457년(세조 3) 세자 장(璋:세자때 죽어 뒤에 덕종으로 추존됨)은 세조의 맏아들이자 성동의 아버지이다 ,덕종과 정비 소혜왕후 한씨의 능

소혜왕후 한씨의 능

덕종의 능

 

 

 

창 릉

조선 제 8대 1470년(성종 1) 덕종의 아우인 예종과 그 계비인 안순왕후 한씨의 능

안순왕후 한씨의 능

예종의 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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