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역사 여행

13,02,22 도산서원 안동시

세월민초 2013. 2. 27. 01:19

                                 

                             13,02,22 내가 가본 역사기행


도산서당에 앉아 깊은 인연을 맺는다

                                                                                                         

조선 시대 지성을 대표하는 세 명을 꼽는다면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그리고 우암 송시열일 것입니다

이 세 분의 공통점은 산을 좋아했다는 것이며 그 문인들 역시 스승이 좋아했던 산을 오르고

 산수기 및 산수유기를 남겼다는 사실입니다


퇴계 이황은 청량산, 남명 조식은 지리산, 우암 송시열은 속리산을 본산으로 하였으며

그들의 학문적 전통과 삶은 그렇게 세 개의 산으로 비유될 수 있으며 그 들이 걸었던 거묵의 산길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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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읽어보면 좋은 글-

 

28세(1528)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33세에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하고 《심경부주 心經附註》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하였다

이해 귀향도중 김안국(金安國)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34세(1534)에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37세에 내간상(內艱喪)을 당하자 향리에서 3년간 복상하였고, 39세에 홍문관수찬이 되었다가 곧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임명되었다

 중종 말년에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먼저 낙향하는 친우 김인후를 한양에서 떠나보내고, 이 무렵부터 관계를 떠나 산림에 은퇴할 결의를 굳힌듯

 43세이던 10월에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삼아 사가를 청하여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을사사화 후 병약을 구실삼아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46세(1546)가 되던 해 향토인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의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庵)을 얽어서

  산운야학(山雲野鶴)을 벗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생활에 들어갔다. 이때에 토계를 퇴계(退溪)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그뒤에도 자주 임관의 명을 받아 영영 퇴거(退居)해버릴 형편이 아님을 알고 부패하고 문란된 중앙의 관계에서 떠나고 싶어서 외직을 지망

 48세에 충청도 단양군수가 되었으나, 곧 형이 충청감사가 되어 옴을 피하여 임명 전에 청하여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
풍기군수 재임중 주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부흥한 선례를 좇아서, 고려 말기의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安珦)이 공부하던 땅에

 전임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서적(書籍)·학전(學田)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하여 조정에 청원하여 실현을 보게 되었는데

이것이 조선조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1년 후 퇴관하고, 어지러운 정계를 피하여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지어 다시금 구도생활에 침잠하다가 52세(1552)에

 성균관대사성의 명을 받아 취임하였다.56세에 홍문관부제학, 58세에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였다

 43세 이후 이때까지 관직을 사퇴하였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수회에 이르렀다.
60세(1560)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하고, 이로부터 7년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훈도하였다.

 

명종은 예(禮)를 두터이하여 자주 그에게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듣지 않자, 근신들과 함께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으로 보내어 그 풍경을 그리게 하여 그것에다 송인(宋寅)으로 하여금 도산기(陶山記) 및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써넣게 하여

병풍을 만들어서, 그것을 통하여 조석으로 이황을 흠모하였다 한다.
그뒤 친정(親政)의 기회를 얻자, 이황을 자헌대부(資憲大夫)·공조판서·대제학이라는 현직(顯職)에 임명하여 자주 초빙하였으나

 그는 그때마다 고사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67세 때 명나라 신제(新帝)의 사절이 오게 되매, 조정에서 이황의 내경(來京)을 간절히 바라 그도 어쩔 수 없이 한양으로 갔다

 명종이 돌연 죽고 선조가 즉위하여 그를 부왕의 행장수찬청당상경(行狀修撰廳堂上卿) 및 예조판서에 임명하였으나 신병 때문에 부득이 귀향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황의 성망(聲望)은 조야에 높아, 선조는 그를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우찬성에 임명하여 간절히 초빙하였고

 그는 사퇴하였지만 여러차례의 돈독한 소명을 물리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무진육조소 戊辰六條疏〉를 올렸다. 선조는 이 소를 천고의 격언, 당금의 급무로서 한 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맹약하였다 한다
그뒤 이황은 선조에게 정자(程子)의 〈사잠 四箴〉, 《논어집주》·《주역》, 장재(張載)의 〈서명 西銘〉 등의 온오(蘊奧)를 진강하였다.
노환 때문에 여러차례 사직을 청원하면서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서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학십도 聖學十圖》를 저술, 어린 국왕 선조에게 바쳤다

 

이듬해 69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번번히 환고향(還故鄕)을 간청하여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환향 후 학구(學究)에 전심하였으나, 다음해 70세가 되던 11월 종가의 시제 때 무리를 해서인지 우환이 악화되었다

 그달 8일 아침,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키고, 일으켜 달라 하여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易簀: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하였다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 영사를 추증하였고

 장사는 제일등 영의정의 예에 의하여 집행되었으나, 산소에는 유계(遺誡)대로 소자연석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새긴

 묘비가 세워졌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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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은 1501년에 태어나 1570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 시기는 조선 성리학의 학문과 문화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져 나가던 때이다

 이때를 기점으로 하여 조선은 전과 후로 나뉜다. 전의 조선은 고려 이후의 조선이고, 후의 조선조선조선이다

 전의 조선은 불교문화와 성리학 문화가 간섭된 조선이고, 후의 조선은 성리학 문화로서의 조선이다
도산서당은 전 조선과 후 조선을 나누어 놓을 변화의 역량을 만들어 나간 곳이다. 이곳은 서당 영역과 서원 영역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아래쪽은 서당 영역이다. 만년의 이황은 노구를 이끌고 편안히 드나들 수 있는 곳이면서, 산과 물이 어우러진 공간을 찾았다

 그런 곳에 머물러 공부하면서 교육할 수 있는 집을 짓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찾아낸 터전이 바로 도산 남쪽 기슭이다

 

조선 성리학사 속에서 이황 이전은 『소학(小學)』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학문지형을 만들어 낸 것은 길재(吉再)였다

 길재고려가 기울어져 가는 것을 탄식하여 금오산에 은거하며 제자들을 길러 내는 일에 전념하였다. 길재가 길러 낸 제자들은 조선 초기 사상사 속에서

 전기 사림파의 학맥을 일구어 냈다.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전기 사림파 학맥은 ‘몸으로 실천하는 의리’를 표명하였다.

이황은 선배들의 이와 같은 학문 지형 위에 ‘성리학적 마음 수양’을 더하였다. 그 첫 걸음이 된 것이 『심경』의 발견이었다

 이황성균관 유학 시절에 ‘상사 황공’으로부터 『심경』을 전해 받았다고 한다

 이 일은 아마도 이황이 33세 때인 두 번째 성균관 유학 시절에 있었다고 판단되는데, 상사 황공이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심경』과의 만남은 이황 학문의 성격을 결정짓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황은 평생 새벽같이 일어나서 맨 처음 『심경』을 외우는 일로

 하루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황『심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심경』을 얻고 나서야 비로소 심학의 연원과 심법의 정미함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평생토록 이 글을 신명처럼 믿었으며, 엄부처럼 공경하였다.” 이황의 학문이 『심경』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게 해 주는 대목이다

 

이황은 34세 되던 해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로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이황의 벼슬살이는 어머니의 소망을 반영한 것이다

 어머니는 이황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형편상 너는 벼슬을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네가 벼슬을 한다면 고을살이를 하는 것은 좋을 것이나

고관이 되는 것은 적합하지 않으리라.” 이황의 품성의 일단을 알게 해 주는 말이다.
이황은 다른 이들과 사귀기가 쉽지 않은 맑고 꼬장꼬장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러므로 높은 벼슬을 하여 다른 이들과 부대끼기보다는

 지방관으로 나아가 조용히 자신을 구현하는 것이 더 좋겠다고 어머니가 판단했을 것이다

 결국 훗날 이황이 지방관을 자청한 것도 이러한 어머니의 유훈과도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황의 시대도 사화(士禍)의 시기였다. 이황은 청년 시절에 기묘사화(己卯士禍)를 겪었고, 관인으로서는 을사사화(乙巳士禍)를 겪었다

 이황의 형 이해(李瀣)는 동궁 시절의 인종을 모신 근신으로, 인종이 처음 즉위하였을 때 이기(李芑)를 우의정에 임명하는 문제를 놓고

사헌부사간원에서 이를 반대하였는데, 이해가 이때 대사헌에 있었으므로 이기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1년도 채 되지 않았던 인종 시대가 지나고 명종이 즉위하자 권력은 문정대비, 윤원형(尹元衡) 등에게 집중되었다

 이기윤원형 세력의 한 축을 형성하여 재상으로 임명되었다. 윤원형은 첩 정난정을 시켜 문정대비에게 윤임(尹任) 계열이 역모를 꾀한다는 무고하여

윤원형 계열의 소윤파가 윤임 계열의 대윤파를 일거에 몰락시킨 이른바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1545년(명종 즉위년) 8월에 일어난 을사사화의 광풍은 이황 형제를 피해 갔으나, 10월에 이르러 이기이황을 죄 있는 사람 중 하나로 지목하였다

 이황은 지인들의 도움으로 구원되었지만 엄청난 충격을 받아, 이후 조정에서 물러나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였고

 결국 휴가를 청하여 고향인 온혜로 내려오게 되었다.

1545년 이황은 을사사화의 광풍을 피해 지산와사로 돌아왔으나,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10년 넘게 정을 붙이고 살았던 부인의 죽음으로 비어 버린 집이었다. 이황은 더욱 의기소침하여지고, 더욱 세상에 대한 관심을 잃어 갔다

  이황은 사람들의 출입이 빈번한 지산와사를 떠나 온계의 아래쪽에 있는 한적한 토계의 끝자락에 옮겨 작은 집을 짓고

 개울가에 물러나 앉았다는 의미로 호를 ‘퇴계’라 지었다.

조정은 용담호혈이었다. 윤원형의 권력욕이 일으키는 크고 작은 옥사가 을사년에서 정미년으로 이어지면서 계속되었다

 권력 투쟁에 염증을 느낀 이황은 어머니의 유훈대로 지방관을 자청하였다 48세 되는 해 정월 단양군수 직이 주어지자 이황은 나르듯 달려갔다

 그런데 같은 해에 10월 형 이해가 충청도관찰사로 보임되자, 형제를 같은 관할 지역에 둘 수는 없는 일이었으므로 이황에게 다시 풍기군수에 제수되었다.
단양군의 아전들은 이임하는 군수 이황에게 관아의 밭에서 기른 마대 한 지게를 선물로 내놓았다. 관례에 따르면 이임하는 관장의 노자로 쓰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황은 관례라 하여 재물을 취할 수는 없는 일이라며 거절하였다. 그의 봇짐 속에는 오직 단양의 괴석 두 개가 들어 있을 따름이었다

 

1546년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한 안현백운동서원에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여 준다. 그런 상황에서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한 것이다

 군수 이황은 서원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관의 일이 끝나면 서원에 나아가 직접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향교가 지역의 중등 교육기관이라면, 서원은 지역의 고등 교육기관이 되는 조선 후기의 문화 지형은 여기서부터 비롯되었다.

이황은 다시 은거를 꿈꾸었다. 물러나 가르치기, 평생 마음속에 묻어 두었던 소망이 새로이 분출하게 된 계기는 분명 백운동서원 탓이었다

  이황은 거듭 사직 상소를 올리는 한편, 경상도관찰사 심통원에게는 백운동서원을 사액사원으로 하여 주기를 청하는 글을 올린다.

49세 되는 해 겨울, 세 번 사직 상소를 올린 뒤 이황은 왕의 윤허가 떨어지기 전에 짐을 꾸려 풍기를 떠났다. 풍기군수로 1년 2개월을 재직한 후였고

 34세에 벼슬살이를 시작한 지 15년이 되는 해의 일이었다. 고향으로 향하는 이황의 짐 보따리는 책궤 두 짝이 전부였다

 궤는 관의 물건이라 하여 뒤에 되돌려 보냈다. 이황풍기를 떠난 뒤 백운동서원은 소수서원으로 사액되었다.
조정의 윤허 없이 임지를 떠났으므로 이황에게는 고신 박탈에 2등급 강등의 벌이 내려졌다. 고향으로 돌아오니 집은 퇴락해 있었다

 1550년 2월 이황은 여러 곳을 전전한 끝에 퇴계의 서쪽 상계로 들어와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집이 완공되자

이황은 ‘빈한한 처지로 물러나 숨어 사는 곳’이라는 뜻을 담아 ‘한서암’이라 이름을 짓고, 당의 이름은 ‘고요히 익힌다’는 뜻으로 ‘정습당’이라 하였다
퇴계로 물러나 앉으며 이황은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몸이 물러남은 못난 분수에 만족함이나/ 배움에서 물러남은 늙어 노쇠함을 걱정함이네/

 퇴계 위쪽에 비로소 자리 잡고 살게 되었으니/ 흐르는 물 바라보며 매일같이 성찰하리라.” 4월에는 한서암 앞에 방당(方塘)을 파고 광영당이라 하였다

 빛 그림자가 어리는 못이란 뜻이다

 

조선 성리학사는 이황이이(李珥, 1536~1584)로 양분된다. 두 사람은 두 세대를 연이어 태어나서 학파의 시대 조선

 학문의 시대 조선을 여는 주역이 되었다. 1558년(명종 13), 이황이 아직 계상서당에 살고 있을 때 22세의 이이사인당 노경린의 딸과 혼인을 하였다

 당시 노경린은 성주목사로 재직 중이었는데, 10년 전에는 양진암 시대의 이황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이이는 혼인한 이듬해 성주로 장인을 찾아갔다가 돌아가면서 이황을 찾아갔다. 이이는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지어 자신의 마음을 전하였다

 “시내는 나누어지니 수수와 사수로 갈라지고/ 봉우리는 빼어나니 무이산이라/ 천 권 경서에서 활로를 찾고/ 몇 칸 누옥에서 살아간다네/ 옷자락 속 품은 생각

 펼쳐 내면 맑은 달이 뜨고/ 웃으며 얘기하니 미친 난초 잎조차 조용해지네/ 어린아이 찾아와 도를 얻어 듣기 바랐더니/ 반나절 한가함조차 훔쳐 갈 수 없어라.”

이에 이황은 역시 시 한수를 지어 이렇게 답하였다. “병든 내가 문을 막고 숨어 봄을 만나 볼 수 없었으니/ 그대 찾아와 막힌 문 깨치고 몸과 마음 깨워 주네/

높은 이름 얻은 이 중 못난 선비 없음 알았어라/ 젊은 날 몸 공부 소홀히 한 게 부끄러워/ 좋은 낱알 거두려면 돌피가 익게 해선 안 되고/

 티끌 사이에서 노닐다간 거울 닦을 사이 없어라/ 너무 감상적인 시어는 잘라내 버리듯이/ 각자 몸 가까운 데서부터 힘쓰고 닦을 일이네

” 가르치고 가르침 받음이 이보다 더 곡진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 자료는 도산서원,중원문화유산등 여러 자료를 펌 -

 


 

이황은 21세에 의령허씨 묵제 허찬의 딸과 혼인하였다. 허찬의령 사람으로, 창계 문경동의 맏딸과 혼인하여 영주 푸실로 와서 살았다

이황의 숙부 송재 이우와 친교가 있었다. 허씨 부인은 이준·이채 두 아들을 낳았으나, 이황의 나이 27세에 타계하여 영주 문경동의 묘소 뒤에 묻혔다
기록에 따르면 이황은 두 부인을 두었다. 두 번째 부인은 풍산 가일안동권씨 사락정 권질의 딸이자 화산 권주의 손녀였다

권주는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났고, 권질은 이때 예안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권씨 부인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계속된 옥사에 충격을 받고 정신이 온전치 않게 되어 적당한 혼처를 찾을 수 없었으므로

권질이황에게 부탁한 것이다. 이황은 30세에 권씨 부인을 맞이하여 43세에 여의었다  - 펌 -

 

퇴계가 어느 날 조문을 가려다 도포 자락이 헤어진 것을 보고 권 씨 부인에게 꿰매 달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빨간 헝겊을 대서 도포를 기웠다

그는 말없이 그 도포를 입고 조문을 갔다. 사람들이 그의 도포 자락을 보고 물었다

흰 도포에는 빨강 헝겊으로 기워야 하는 것입니까 ?

예법에 관해 묻는 말에 퇴계는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하였다

 그는 빨간 헝겊일망정 도포를 기워준 부인의 마음을 더 고마워했으며
이처럼 퇴계는 넓은 마음으로 좀 모자라는 부인을 이해하고 사랑하였다

 그러나 두 번째 부인도 그의 나이 43세 때 세상을 떠난다

 

 32년의 세대 차이를 넘어 짧고 강렬한 러브스토리

 

낙동강 물이 흐르는 도산서원 뜰 녘에서

퇴계 이황은 사랑했던 여인 두향을 그리워했으리라

  두향은 어려서 일찍 부모와 사별하여 단양 고을 퇴기인 수양모 밑에서 자라났다고 한다

 그녀는 13세가 되었을 때 수양모에 의해 기적에 올려졌으며, 16세 때 황초시와 결혼하였으나
 결혼 석 달 만에 남편 황초시가 세상을 떠나자, 두향은 다시 어쩔 수 없이 기생이 되어 단양 관기로 활동하였다

 그녀는 거문고를 잘 타고 매화와 난초를 특히 사랑하였다고 한다

퇴계가 단양군수로 온 것은 아마도 두향이 남편을 잃고 다시 관기로 활동하기 시작한 직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16세의 나이에 남편과 사별한 여인 두향

두 부인과 사별한 채 둘째 아들까지 잃어 상심에 젖어 있던 48세의 퇴계가 만난 것이다
두 사람의 사랑은 각별하였던 모양이다. 두향이 매화를 극진히 아끼고 좋아하였듯이 퇴계 역시 매화를 사랑하였다

 누가 먼저 매화를 좋아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매화가 그들의 사랑을 접목해주는 상징적인 꽃이었다

 

다음은 웹진 ‘사람의 향기’에 실린 퇴계 이황과 두향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퇴계는 누워서 지긋한 눈으로 매화를 바라보았다. 청매화다. 화분 속에 분재로 키운 청매화는 이미 오래된 나무였다

그러나 그 순간 그의 눈에 어리는 것은 매화 꽃송이가 아니라 불과 16세의 앳된 여인이다


“두향!” 퇴계는 혼잣말로 이름 두자를 읊조려 본다
두향(杜香)은 퇴계가 죽기 전까지 마지막으로 사랑했던 여인이다 기록상으로 볼 때 퇴계는 평생 세 여인을 가까이 하였다


 

 


기생이였으나 총명하고 학문과 예술의 깊이가 두터웠던 여인 !

 동방 최고의 선비로 칭송받던 퇴계 마음을 사로잡다

 

퇴계 이황이 사랑하는 두향에게

黃卷中間對聖賢 (황권중간대성현)옛 성현의 오래된 책을 대하며

虛明一室坐超然 (허명일실좌초연)초연히 밤을 새워 앉아 있노니

梅窓又見春消息 (매창우견춘속식)창가에 다시금 봄 소식 보게하여

莫向瑤琴嘆絶絃 (막향요금탄절현)기막힌 비파소리 대하는 듯 싶네


두향은 조선시대 단양 태생의 관기(官妓)로 시와 거문고에 능해 이황이 단양군수로 부임해 오자

그를 일편단심 사모했으나, 퇴계의 단양 시절은 열달만에 끝나고 풍기군수로 다시 전근을 가게 됩니다


그것은 고을 수령은 임기가 보통 5년인데, 그의 넷째 형 온계 이해(李瀣)가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게 된 것이 까닭이었습니다
형제가 같은 도에서 근무하는 것이 온당하지 않다 하여 퇴계는 고개 너머 경상도 풍기 군수로 옮겨가게 되며 이를 '상피제도'라 한답니다

짧은 인연 뒤에 찾아온 급작스런 이별은 두향에겐 큰 충격이었던 모양입니다. 단양을 떠날 때 퇴계의 봇짐 속엔 수석 두 개와

 두향이 마음을 담아 선물한 매화 화분 하나 뿐이었다고 한다. 그는 이 매화를 평생 애지중지했으며
늙어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인 안동에 내려갔을 때도 이 매화와 늘 함께 했다고 합니다
지금 도산 서원에 있는 매화도 그때 그 나무의 후손이라고 추측이 드는군요

그는 도산서원 입구 한켠에 절우사(節友社)란 정원을 꾸며놓고 거기에 솔, 대, 국화, 연(蓮)과 함께 매화를 심고,

자신을 포함해 절친한 '여섯 벗'이라 하며 즐겼다고하지요. 

 

이별을 앞둔 마지막 날 밤, 밤은 깊었으나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퇴계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일이면 떠난다. 기약이 없으니 두려운 뿐이다." 두향이가 말없이 먹을 갈고 붓을 들었다

그리고는 시 한 수를 썼다


이별이 하도 설워 잔 들고 슬피 울어

어느덧 술 다 하고 임 마저 가는구나
꽃 지고 새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사랑하는 임을 따라 아름답게 죽을 수 있는 여인 !


 퇴계가 10개월만에 단양군수 직을 떠나자, 그녀는 퇴적계(退籍屆)를 내놓습니다

신임 사또에게 ‘이황을 사모하는 몸으로 기생을 계속할 수 없다’며 기적(妓籍)에서 이름을 없애달라고 간청

기생을 면했다고 전해온답니다.
두향은 구담봉 앞 강선대가 내려다보이는 강 언덕에 초막을 짓고 은둔생활을 했고

그후 상사병으로 시름시름 앓다, 나중에 퇴계가 안동에서 타계하자

두향은 강선대에 올라 거문고로 초혼가를 탄 후 자결했다고 전하는데, 이렇게 유언했다고 한다


내가 죽거든 무덤을 강가 거북바위에 묻어다오

거북바위는 내가 퇴계 선생을 모시고 자주 인생을 논하던 곳이다

그녀는 유언대로 강선대 가까이에 묻혔고, 그로부터 단양 기생들은 강선대에 오르면

반드시 두향의 무덤에 술한잔을 올리고 놀았다고 전한답니다

1976년 소설가 (故)정비석은 그곳을 직접 찾아 충주댐이 완성되면 두향의 무덤이 수몰돼니 단양군수에게 이장을 청하여

지금의 안전지대로 옮겨졌으며 소설가 정비석(1911-1991) 씨가 쓴 명기 열전에는 두향이 죽령을 넘어 풍기로 찾아가 먼발치에서

 퇴계를 바라보고 돌아오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시사단


 1792년(정조 16) 3월에 정조가 이조판서 이만수(李晩秀)에게 명하여 퇴계 이황(李滉)의 학덕과 유업을 기리는 뜻에서

 도산별과(陶山別科)를 신설하여 안동 지역의 인재를 선발토록 한 데서 비롯되었다

도산별과는 문과 2인, 진사 2인, 초시 7인, 상격(賞格) 14인을 선발하는 별시(別試)로서

 그 과시(科試)가 시사단(試士壇)에서 거행되었다,총 응시자가 7,228명이었고 임금이 직접 11명을 선발하였다

 


수령이 400~450년으로 추측되는 왕버들 나무 2 그릇



1561년에 도산서당이 설립되었으니 왕버들 나무들도 그때 심었으리라는 추측이며 정확한 연대는 없다

나무의 고목과 수령으로 보아 그 당시 서원과 함께 긴 세월을 모질게 견디며 오늘에 퇴계를 말하는 듯하다

관리사무소에 확인해 보니 서원 앞까지 낙동강 물이 흐르고 왕버들 두 그릇은 강둑 아래에 있었는데

1976년 안동댐을 건설하면서 흙을 쌓아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흙을  쌓기전에는 커다란 고목을 받치는 뿌리가 아주 장관이었다 한다

 

 

 

 

 

 



 매화나무

 

梅花 庚申(매화 경신)

                                                 

溪邊粲粲立雙條 계울가에 아름다운 매화 두 그루 서 있어

계변찬찬입쌍조

香度前林色暎橋 앞 숲까지 향기 품고 다리 위엔 빛 비치네.
향도전림색영교

未怕惹風霜易凍 찬바람 서리에 쉬이 얼까 두렵지 않지만,
미파야풍상이동

只愁迎暖玉成消 옥빛이 햇빛 맞아 빛 바랠까 근심되네.
지수영난옥성소

 

사랑하는 여인 두향과 같았던 매화분

그는 죽는 순간의 더러움을 사랑하는 여인에게 보이기 싫었다

 

선조 3년1570년 이황온혜의 종가에서 시향을 올릴 때 한질이 시작되어 자리보전하고 눕게 되자

손 가까이 두고 지내던 매화 분을 치우게 하였다

 매화는 깨끗함과 절개를 가르쳐 주던 벗이었다. 깨끗한 벗에게 자신의 더러움을 보여 주는 것을 이황은 참을 수 없었다

육신의 고결함을 지키려는 이횐의 노력은 정신의 깨끗함을 지키려는 노력과 동일 선상에 놓여 있었다.

  평생을 전전긍긍하였던 이황의 삶의 방식이 매화 분을 치우게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될 수 있을 터이다.

 “국장을 하지 말아라.”, “유밀과를 쓰지 말아라.”, “비석을 쓰지 말아라.

 그저 작은 돌을 세우고 표면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는 몇 자만 쓰라.” 등의 몇 가지 유훈을 남기고

12월 8일 70평생의 삶을 마무리하였다 .

 


도산서원 전경


도산서원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1574년(선조 7)에 지어진 서원으로

 경북 안동시 도산면(陶山面) 토계리(土溪里)에 위치하고 있다.

서원의 건축물들은 전체적으로 간결, 검소하게 꾸며졌으며 퇴계의 품격과 학문을 공부하는 선비의 자세를 잘 반영하고 있다
도산서원은 건축물 구성면으로 볼 때 크게 도산서당과 이를 아우르는 도산서원으로 구분된다
도산서원은 퇴계선생 사후 6년 뒤인 1576년에 완공되었다 

 


경내로 들어서면 좌측에 도산서당이고 우측에는 농운정사 뒷편에 하고직사가 자리 잡고 있다

이 3개 건물은 퇴계선생이 직접 건축하여 서당,기숙사,생활관으로 사용하였고 도산서원과 나머지 건축물은 사후에 건립되였다

 


도산서당에 앉아 깊은 인연을 맺는다

 

 대제학이란 벼슬 하에 머물렀던 곳은 너무나 누처했다

퇴계 선생이 사신 2평 남진한 도산서당 아주 작은 방과 유생들이 공부한 마루

 

퇴계선생께서 4년에 걸쳐 지으신 건물로 몸소 거쳐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거처하시던 방은 2평도 안되여 보이며 "완락재"라 하고 마루는 "암서현"이라 하였다

도산서당은 1561년(명종 16)에 설립되었다. 퇴계선생이 낙향 후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을 위해 지었으며

서원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퇴계선생이 직접 설계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때 유생들의 기숙사 역할을 한 농운정사와 부전교당속시설인 하고직사(下庫直舍)도 함께 지어졌다

 



오랜 세월을 거처하신 아주 작은 방이다


남쪽으로 창살이 있는 작은 쪽문과 출입문이 하나 있고 햇빛은 그 곳으로 들어온다

 마루 쪽으로 두 문이 있는데 두 문짝이 합판으로 막혀 있는 특이한 문이며 안쪽에서 하얀 벽지로 발랐다

퇴계 선생께서 직접 설계하였다니 건축물과 알 수 없는 특별한 문의 구조를 연구해 볼 만하다

 


 

 



서광명실


책을 보관하는 서고로서 현판은 퇴계 선생 친필이다

동, 서두 곳으로 나누여져 있으며, 습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누각 식으로 지었다

 


동광명실

 


도산서원 전교당


죽은지 4년 만에 고향사람들이 도산서당 뒤에 서원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낙성, 도산서원의 사액을 받았다

그 이듬해 2월에 위패를 모셨고, 11월에는 문순(文純)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중앙의 전교당은 강학공간과 원장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재 뒤편으로는 책판을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이 자리하고 있다

동편 도산서당건물을 ‘박약재(博約齋)’와 서편 건물을 ‘홍의재(弘毅齋)’라 하는데 유생들의 기숙사로 안마당을 중심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다


 

 

 



서재, 홍의재(기숙사)

 


동재, 박약재(기숙사)

 

 




삼 문을 통하여 들어가면


 배향공간인 사당 건축물로는 위패를 모셔놓은 상덕사(尙德祠)와 각종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전사청(典祀廳)이 있는데

 삼문을 경계로 서원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례를 지내고 있다

 부속건물로는 서원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상고직사(上庫直舍)가 있으며 이는 홍의재 뒤편에 위치하고 있다

 


작은 문을 통하여 들어가는 상고 직사

 


상고 직사 (서원을 관리하는 살림 집이며 유생들의 식당인 듯)

 


독특한 양식의 건축으로 돌과 기둥 사이 습기를 방지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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