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행은 설악산 대청봉 눈사태로 못 가고 울산바위를 산행할 계획이었으나
폭설로 1m 눈이 쌓여 설악산 전 구간이 통제되어 흔들바위를 겨우 산행하였다
그러니까 2월 11일 흔들바위를 산행하고 24일 흘림골과 주전골을 산행하려 했으나
또 눈이 계속 내려서 설악산 전 구간이 통제되었습니다
설악산에서 내려와 낙산사에서 1박 하고 양양 남대천을 지나 인구해변 죽도정을 돌아
휴휴암을 거쳐 오죽헌에 이른다.
오죽헌은 이번이 3번째다
오죽헌은 본래 신사임당 생전에 건축된 것이 아니라
그보다 약 백년 전인 15세기 중엽에 건축된 것이 상속되어 신사임당에 이르게 된다
오죽헌을 건축한 인물은 최치운이라는 강릉의 참판이며 그 후 아들에게 상속되었고
다음은 사위 이사온에게 상속되었으며 다시 신명화에게 상속되었다
신명화가 바로 신사임당의 친부이자 율곡 이이의 외조부이다
그 후 사위 권처균에게 물려주었고 오죽헌의 택호는 권처균의 호에서 유래된 것이다
신사임당의 외고조부인 최치운에게서 내려온 고택이 약 백년의 세월이 흘렀다.
보물 제165호, 정식 보물 명칭은 '강릉 오죽헌(江陵烏竹軒)'이다
죽헌동에 있는 조선 중기의 목조 건물로 단일 주거 건축으로 역사가 가장 오래되었다
'오죽헌'이라는 명칭은 뒤뜰에 검은 대나무가 자란 것을 계기로 붙었다
검은 대나무를 까마귀 오(烏)자를 써서 오죽(烏竹)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신사임당의 친정집으로 이곳에서 율곡 이이가 태어났다.
1975년 오죽헌 정화 사업으로 율곡 이이의 영정을 모신 사당 문성사를 건축하였다.
이이는 조선 전기 동호문답. 인심도심설.성학집요 등을 저술한 학자이자 문신으로
1536년(중종 31)에 태어나 1584년(선조 17) 그의 나이 48세에 사망했다
율곡은 19세 때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했으나 20세에 하산해 유학에 전념했다
이후 총 9번의 과거에 모두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이라 불렸으며
1568년 천추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583년 병조판서가 되어
선조에게 시무육조와 십만 양병설 등 개혁안을 올렸다.
정문을 들어서면 우측으로 약 600년이 넘는 배롱나무가 지금도 건실하게 잘 자라고
율곡 선생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합니다.
오죽헌 율곡매, 천연기념물 제484호
이 나무는 세종 22년(1440년)경에 이조참판을 지낸 최치운이 오죽헌을 건립하고
별당 후원에 심었다고 하며 신사임당과 율곡 선생이 직접 가꾸었다고 한다
신사임당은 여러 매화 그림을 그렸고 맏딸의 이름을 매창이라고 지을 만큼 매화를
사랑했다고 한다
율곡매는 꽃 색깔이 연분홍인 홍매 종류이며 열매는 다른 나무에 비하여 알이 굵었다.
밖에서 들어오면 좌측 건물이 사랑채고 기둥 위에 주련 글씨는 추사 김정희가 썼다
사랑채를 지나 뒤 틀로 들어가면 안채다.
옛 건물을 새로 복원하고 증축하여 아래의 화려한 한옥이 건축되었다.
안채와 사랑채
영상으로 본 오죽헌,,
거래의 어머니 신사임당으로 칭송하다.
오천 원권 율곡 이이와 오만 원권 신 사임당
오천 원권 뒤면애는 오죽헌
내가 발행한 최초 돈입니다
오죽헌 화폐 전시관에서 최초로 100,000원권 지폐를 만들어 보았습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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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MZ 군사 분계선 따라가는 자전거 여행
2015년 7월 11일. 인천시 강화도 교동에서 강원도 고성군 통일 전망대까지
36도 폭염 속에 임진강을 거슬러 감악산을 넘다
화석정 유적지 찾기
파주시 율곡로 4차선 도로 진입하여 여우고개를 지나면 길가에 율곡과 신사임당 있는
곳이라는 간판이 아주 크게 있고 조금 가면 우측으로 화석정가는 이정표가 있다
일단 4차선에서 나와 네비를 확인하니 거리가 멀다 화석정 캠핑장을 잘 못 본 것이다
화석정은 임진강 강변도로 위 바로 코앞에 있었는데 그냥 지나쳐 넘 아쉽다.
화석정과 임진강
화석정은 원래 고려 말의 유학자인 길재(吉再)가 조선이 개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었는데 사후 그를 추모하여 서원을 세웠다
그 후 폐허가 되었다가 율곡 이이의 5대조인 강평공 이명신(康平公 李明晨)이
세종 25년(1443년)에 정자를 세우고 1478년 증조부 이의석(李宜碩)이 중수하였다
이숙함이 화석정이라 명명하였으며, 이이 때에 이르러 다시 중수된 유서깊은 곳이다
율곡 선생은 선조때 10만양병설을 주창 했지만 유성룡 등 밀려 받아들러지지 안 했다
그후 낙향하여 평소 정자에 제자들과 함께 기둥과 서까래 등에
들기름을 반질반질하게 먹여 두었다고 하는데,,
훗날 임진왜란(선조 25년, 1592년)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파천할
당시(4월 29일 밤) 억수같은 폭우속에서 임진강을 건널 때 이항복이 화석정에
불을 질러 무사히 배가 임진강을 건넜다고 전한다
그러니까 율곡은 이러한 사태를 먼저 대비하여 화석정에 들기름을 칠했다 하니
얼마나 영특한 위인이라 하겠는가?
율곡이 그토록 주장했던 10만 양병설을 받아들여 선조가 군사를 양성했다면
역사의 쓰라린 상처투성이 임진왜란은 없었을 것이다.
율곡리
경기도 파주시 율곡리에는 율곡 습지공원과 율곡 수목원이 있어 잠시 관광을 하기로 하는데
낮 기온이 36도 폭염 주의보다 대지는 열기에 후끈하고 바람 한점 없는 무더운 날씨다.
이곳은 임진강 둑방 철책선 아래입니다.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산5-1, 자원 서원
[유남 대서대중대숙우상원(遊南臺西臺中臺宿院)]
율곡 이이
깊은 산골에 날씨 활짝 개었는데
바위에 흐르는 물소리 맑기도 하구나
오대산 가는 곳마다 흥취에 끌리어
이끼 길에서도 발걸음 가볍다
다래덩굴 휘어잡고 절정에 오르니
휜 구름 추른 벼랑에 피어 일고
옹기종기 작은 산들을 굽어보니
여기저기에 연기낀 나무들이 펀펀하네
돌 틈에 흐르는 우통수의 차가운 샘물
답답한 심정 나도 어쩔줄 모르겠네
한번 마시니 세상일 다 잊고
선방(禪房) 방석에 앉으니
새벽 종소리에 깊은 반성 떠 올라
담담한 심정 나도 어쩔 줄 모르겠네
율곡 이이의 출생과 성장기를 알아보자
어머니 신 사임당 (19세)는 출가 당시 아버지 이원수(22세)가 수운판관이란
관직에 있었다. 조세 곡물을 나라에 운반하는 선박 일을 하는 벼슬이다
신사임당은 강릉에서 출가하여 강릉부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서 살림을 시작하였다
* 여기서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가 근무했던 곳 백옥포리 나루터가 있었을까?
강원도 봉평면 산골짜기에서 곡식을 싣고 영월로 가는 뱃길이 있어야 한다
메밀꽃 필적에,, 봉평면 평촌리 율곡 사당 앞에는 흥정천이 흐르고 이 천을 따라
장평을 지나면 평창강이다
영월로 접어들면 서강이고 더 내려가면 아우라지 땜목 천 삼백리 동강과 만나
남한강에 이른다
옛날에는 흐르는 물 수량이 많아서 가능했으리라, 이곳에서 18년을 근무했다 *
그곳에서 12년째 되는 해에 이이를 잉태하여 친정인 강릉 오죽헌에서
신 사임당의 나이 33세 때 4남 3녀 중 다섯째인 3남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율곡 이이는 백옥포리에서 어린 시절 6년의 세월을 보내고
한양으로 이사하여 수진방(수송동과 청진동 사이)에서 소년 시절을 보낸다
19세 때 어머님을 잃은 슬픔에 금강산으로 들어가 불교에 심취하다
20세에 속세로 돌아와 강릉 외가에 머물다 21세 봄에 한양으로 돌아와
한성시에 장원급제하고 다음 해 22세 때 성주 목사 노경린의 따님과 혼례 한다
파주에는 자원서원이 있고 가족 묘가 있는데 신사임당 합장묘와
율곡 부부 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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