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과 사진 여행

19.04.24 김일엽 스님과 나혜석 화가를 찾아 가는 길

세월민초 2019. 4. 26. 00:55



올해는 불기 2563년 5월 12일


고요한 산사 금단의 성

비구니 스님을 찾아가는 길에,,


그동안 수덕사에 몇 번을 왔으나 비구니에 대한 궁금증이 더하던 차

 이번 기회에 조금 더 열정을 가지고 알아봅니다


오늘 가람은 환희대, 견성암을 방문합니다



한국 불교 최초 비구니는

539년 신라 법흥왕 따라 출가한 왕비 묘법



명종 5년(1550) 이자실이 그린 '관음삼십이응신도" 비구니 스님이 합장하고 이다




원통보전과 환희대 가는 길


수덕사 입구에서 약 300m 올라오면 일주문을 지나고 조금 더 오르다

좌측으로 접어들면 돌다리를 건넌다



원통보전 입구



# 원통보전에서 그동안 기다리던 노 비구니 스님을 만나다 #

아미타블~~

일엽스님과 나혜석에 대하여 물었다.



원통보전과 마주 보는 환희대


ㅡ 환희대에서 삭발한 그의 이름 김원주 ㅡ

속세에 뭇 남성들과 통정하고 여자의 변신과 반란의 화려한 비구니

인생 반 반년 속세 38년에 출가하고 법랍 38년 세수 76세에 열반하다

 
일엽스님은 1896년생으로 본명은 김원주(金元周)
평안남도 용강에서 목사의 딸로 태어나 23세에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3.1운동이 있었던 1919년 24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영화학교에 다니다
이내 귀국하여 잡지 '新女子'를 창간하고 시인으로서 신문화운동, 신여성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8년 그의 나이 33세 되든 해 늦은 나이에 출가하고 수도 생활을 하다
그로부터 5년 후 만공스님(63세)을 만나 환희대에서 머리를 깎고 1933년 38세 때 스님이 된다





 1962년에 발간한 '청춘을 불사르고' (값 200원) 대표적 저서이자 그 당시 베스트 셀러였던 초판 발행본이다


오늘날까지도 비구니 스님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글
청춘을 불사르지 못하면 생사를 초월한 영원한 청춘을 얻을 길이 없다는 김일엽 스님의 말씀,,
 
당신은 나에게 무엇이 되었삽기에
살아서 이 몸도 죽어서 이 혼까지도
그만 다 바치고 싶어질까요
 
보고 듣고 생각는 온갖 좋은 건
모두 다 드려야만 하게 되옵니까 ?
 
내 것 네 것 가려질길 없사옵고요
조건이나 대가가 따져질 새 어딨겠어요
 
혼마져 합쳐진 한 몸이건만...
그래도, 그래도,
그지없이 아쉬움
그져 남아요
 
당신은 나에게 무엇이 되었삽기에 ?
 
1928 년 4월 壽松洞 旅舍에서
 

김일엽 스님과 나혜석 화가


한 시대를 풍류 한 김일엽과 나혜석의 뜨거웠던 우정

한 사람은 시인이요 또 한 사람은 화가, 두 여인의 숙명적인 만남과 운명을 알아보자


김일엽은 진남포 삼숭 여학교와 이화학당에서 공부하다 일본 닛산학교로 유학 간 신세대 여성이다

이때 김일엽은 돈 많은 집 남자와 혼담이었으나 거절당하고 한옥 한 채와 많은 땅을 받고 헤어진다, 첫 번째 남자다


두 번째 남자는 미국에서 자연과학을 전공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내정된 이노익이라는 40세 된 신사와 22세 때 첫 결혼을 한다

세 번째 남자는 일본 유학 시절 본처가 한국에 있는 시인 노월 임장화와 간통한 사건으로 이노익과 이혼하고

네 번째 남자로 일본 명문가 출신 오다 세이지와 열애에 빠져 아들 김태진을 낳았으나 헤어지며 오다에게 넘겨주고 귀국했다


귀국한 김일엽은 다섯 번째 남자는 친구 유덕의 애인이었던 방인근과 삼각관계에 빠져 스캔들을 일으키다

여섯 번째 남자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국기열과 동거하기도 한다

그러다 불교에 심취하던 김일엽은 독일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돌아오고

일곱 번째 남자 백성욱 박사의 불교 논리에 매료되어 백성욱과 사랑에 빠졌으나 속세를 털고 비구승이 되어

 금강산으로 가 버리자 불교를 더 깊이 알고자 여들 번째 남자 재가승과 동거 하기도 한다

마지막 아홉 번째 남자는 불가의 스승과 제자 사이의 애틋한 마음으로 맺어진 사랑, 혹 만공스님이 안 일지


한 많은 인생사 여러 남자와 사랑에 빠졌지만 사랑도 실패하고 그 후 수덕사에서 출가한다

그리고 아들에게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불러라"매정한 인정 속에 속세를 떠나 비구니가 된 김일엽,,



영원한 사랑의 덫에 걸려 욕망과 욕정에 사로잡혀 씨름하다
그녀의 마지막 가는 길은 출가 없다



옛 수덕 여관


한 시대를 화려하게 살다간 서양화가 나혜석


나혜석은 1896년 김일엽과 같은 해에 경기도 수원에서 부유한 관료의 집안에서 넷째 딸로 태어났고 

 서울 진명여고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 여자미술학교에 유학, 유화를 공부한 신여성이다 

우리나라 여성화가 최초로 외국에서 각종 작품이 입상하고 개인전을 열며 왕성한 그림 활동을 한다

한편, 동인으로 활약하고 신문 잡지에 칼럼을 기고하는 등 신여성으로서 맹렬하게 활동하였으며

이때 춘원 이광수와 교분을 쌓는가 하면 3·1운동에 여학생 참가를 주도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서양화가 나혜석은  일본 유학 후 부유한 집안의 남편과 세계 여행을 떠났다가 파리에 머물며

림을 공부하던 중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지게 되고 국 파경을 맞았다


나혜석

나혜석 작


한국 여성으로 최초 세계 여행을 한 나혜석의 <구미 여행기>를 보면

 1년 8개월 동안 남편과 함께 세계여행을 떠나 유럽과 북아메리카 16개국의 여러 나라, 여러 도시 들을 다닌 것을 기록한 것이다

이 여행은 남편 김우영이 일본 외무성이 변방에서 일한 관리에게 주는 특별 포상인 해외 위로여행 대상자로 선정된 덕분이다


그들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부산>중국>러시아>파리 순서로 떠났다

유럽을 거쳐 미국 본토>하와이>일본>부산으로 다녀왔다


유럽에서는 10여개의 나라를 여행했다. 여행지에서 박물관과 미술관을 다니며 그림에 대한 열정을 키웠고

 한편으로는 각국 여성운동을 접하며 여성의 권리에도 눈을 떴다. 떠나기 전 그는 네가지 물음을 갖고 떠난다?


펌) 나혜석

나혜석 작품


다시 남녀의 애정 이야기를 해보자

특히 은밀한 간통 사건은 호기심과 궁금증이 있어 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이야기다 ㅎ


사건은,, 민족대표 33인 중 하나로 천도교 교령이던 최린(崔隣)이 프랑스 파리를 방문했을 때

한국 유학생들이 주최한 환영회에서 최린을 처음 본 순간 첫눈에 빠져버린 나혜석은 불타는 사랑에 빠진다

그림 그리기에 전념하는 한편 신문 잡지에 여성 인권신장을 위한 칼럼을 기고하던 나혜석은 자신에게 성(性)을 가르쳐준

 최린을 상대로 '유부녀의 정조를 유린했으니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소송을 제기한다

유명한 " 이혼 백서 "가 등장한다


화제를 뿌리며 조롱거리로 전락한 나혜석은 최린 측의 제의로 합의금을 많이 받고 사건을 종결하지만 치명적인 일이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린 딸과 아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 병이 되어 신경쇠약과 손이 떨리는 수전증까지 찾아와

병든 몸을 이끌고 전국을 유람한다


[펌] 혁신적인 生을 살다간 신여성-나혜석2

나혜석 작품


김일엽과 나혜석 두 여인은 이혼의 아픔을 겪고 또 운명적인 만남을 수덕여관에서 다시 이르워진다

그녀는 일엽스님의 주선으로 만공스님에게 출가를 부탁했으나 당신은 색기가 진하여

 스님이 될 제목이 못 된다고 하며 거절당하자 수덕여관에서 수년간 머물며 떠돌아다니다  

결국 한 많은 인생사 무연고자 병동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만약 만종 스님의 배려로 그녀가 비구니가 되었다면

 일엽스님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불교계의 큰 별이자 대 화가가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한 시절 화려한 은막의 뒤 길로 사라진 그녀,,




비구니의 발생지 견성암 가는 길



빨간 겹벚꽃이 떨어져 예쁜 길가를 수 놓는데 견성암 가는 길은 좀 가파른 고갯길을 오른다






가파른 길을 오르면 처음 보이는 건물들이다



 수덕사 견성암 선원 비구니 금단의 성



 

지금의 견성암을 중창한 송만공스님


송만공(宋滿空) 스님은 1871년 3월7일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에서 출생하고

14세의 어린 나이로 야반도주하여 ( 13세 되던 해 부친이 돌아가시자 어머니가 머리깎고

여승이 됨에 따라 중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봉서사, 송광사, 쌍계사를 거쳐 계룡산 동학사에서 진암(眞岩) 노사(老師) 문하에 머물다가

천하의 선지식 경허 선사를 만나 충남 서산의 천장암에서 경허 선사의 속가 형인 태허 스님을 은사로

경허 선사를 계사로 득도하여 월면(月面)이라는 법명을 받고 사미승이 되었다

 

그 후 천장암 마곡사의 토굴에서 수행하였고 부석사를 거쳐 통도사의 백운암에서 마침내 두 번째 깨달음을 얻어

경허 선사로부터 인가를 받고 만공이라는 법호와 함께 전법게를 받았다


이후 만공 스님은 금강산 마하연을 비롯해 명산대찰에서 수행하였고 충남 예산의 덕숭산에 머물며

수덕사, 정혜사, 견성암을 중창하고 기라성 같은 제자들을 길러내며 선풍을 드날리다가
1946년 10월 20일, 세수 76세, 법랍 62세로 열반에 들었다.





한국 최초의 비구니 선방인 수덕사 견성암 선원장을 역임한 명덕 수범 스님


 2018년 5월 27일 동국대 일산병원에서 원적에 들어 29일 덕숭총림 수덕사 연화대에서 다비를 엄수했다

법랍 63년, 세수 75세로 열반에 든 수범스님은 12세 때인 1955년 수덕사 견성암에서 성오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58년 사미니계와 1965년 비구니계를 각각 수지했다


수범스님은 평생을 올곧은 수행자로 정진했으며 자비스럽고 인자한 덕숭산의 노스님으로 평가 받고 있다




명덕 수범스님 다비식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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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 견성암 선덕 수연스님 영결식에서 문도 스님들이 수연스님의 법구를 이운하는 모습


2019년 1월 9일 원적에 든 덕숭총림 수덕사 견성암 선덕 덕림당(德林堂) 수연(修蓮)스님의 영결식이 11일 3일장으로

 견성암에서 산중장으로 봉행됐다

이날 영결식에는 설정대종사와 덕숭총림 수좌 우송스님, 선덕 법안스님, 옹산스님을 비롯한 문도 스님 200여 명이 참석했다

 영결식에 참석한 사부대중은 수연스님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며 스님을 추모했다


설정대종사는 법어에서 “수연스님은 동진출가해 만공 노스님 슬하에서 정진하면서

마지막까지 모셨던 지극한 효심을 가진 스님”이라며 “오늘 만공 노스님을 모셨던 마지막

이 산중의 스님을 보내는 우리들 마음은 애잔하기 그지없다”고 추모했다


1927년 충남 홍성에서 출생한 수연스님은 1938년 성오스님을 은사로 견성암 법기문중으로 출가해

1940년 수덕사에서 벽초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1952년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


또 수연스님은 만공스님이 1942년부터 간월암에서 민족해방과 자주독립을 염원하며 바깥출입을 삼가하고

지극정성으로 천일기도를 드릴 때 덕숭총림 제3대 방장 원담스님과 함께 시봉을 하기도 했다.




선덕 수연스님 다비식 모습


ㅡ 지금까지 글을 작성하매 글 중에는 불교 신문과 법보 신문 여러 자료를 종합하여 수정과 교정을 하였습니다 ㅡ


다음은 덕숭산 중턱에 있는 정혜사를 방문하고 싶습니다

옛날 빈약한 수덕사를 중창하여 지금에 이르게한  여신도와 돈 많은 신라의 청년 이야기를 듣고자 함이다



# 견성암 경내에 단 한 그릇 있는 겹벚꽃을 포스팅하는데

마음이 예쁘고 너그러운 비구니 스님을 생각하며 청순한 잎새를 찍었습니다 #  ㅎ










 일엽스님의 시 중에서,,

땅 끝 하늘가에 임자욱 그 어덴가
자욱조차 스러진데 눈설은 존재들이 무상을 알리지만
 
그지없이 아쉬움은 가신님 뒷모습을
피엉긴 가슴에서 또다시 뒤져내서
 
입술은 떨게 되고 눈물은 그 임인양
떠는 입에 대어드네
 
- 피엉긴 가슴을 안고 사는 R씨에게 -






냇물  나혜석 작


졸졸 흐르는 져 내물
흐린 날은 푸르죽죽
맑은 날은 반 반 
캄캄한 밤 흑색갓치
달밤엔 백색갓치
비오면 방울방울
눈오면 녹혀주고
바람불면 문의지어
아참붓허 저녁 지
밤붓허 새벽 지
춥든지 더웁든지
실튼지 좃흔지
언제든지 쉬임업시
외롭게 흐르는 내물
내물! 내물
저러케 흘너셔
湖되고 江되고 海되면
흐리든물 맑아지고
맑든물 퍼래지고 


 퍼럿튼물  지고(華虹門樓上에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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